희망의 끈46: 희망성취사역의 종말론적 완성(5)(막 14: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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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46: 희망성취사역의 종말론적 완성(5)(막 14:27-52) 예수님의 처절한 기도
예수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고”(33절),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었다”(34절). 예수님도 100퍼센트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희망성취사역을 이해하고 완성시키려고 하셨다. 그 일의 성취를 위한 죽음은 분명 두려운 것이지만, 대가를 치르고도 많이 남을 엄청난 가치가 그 속에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였다”(35절).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고 하였다. 사실 예수님의 이 처절한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였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고, 그 계획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한번 정한 뜻을 변경하실 수 없다. 따라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의 처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뜻을 죽음으로써 따르겠다는 결단이자 육신의 욕망과의 싸움이었다. 반면에 출세에 눈이 어둡고 귀가 먹었던 제자들은 눈앞에 닥친 암흑의 현실을 꿰뚫어 보지 못했고, 세 차례의 수난예고에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였다. 오히려 제자들은 ‘암행어사 출두요!’와 같은 ‘그리스도 출두요!’를 꿈꾸고 있었고, 피곤한 육신을 가누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할 수가 없었고, 예수님의 번민과 고통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라고 세 차례 반복기도하심으로써 신앙 때문에 혹은 삶의 무게 때문에 번민하고 힘들어할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세 번이 갖는 의미는 확증이다. 예수님은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설 때까지 기도하셨던 것이다. 또 예수님은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37-38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신앙 때문에 혹은 삶의 무게 때문에 번민하고 힘들어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친히 본을 보여 주심으로써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할 것을 권면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
그런데 이 위대한 성육신 사건이 절정에 달한 장소는 대권을 탈환한 정치마당이나 대승을 거둔 군사마당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름달빛을 받으며 “땅에 엎드리어” 가슴을 쥐어짜는 고뇌에 찬 기도를 올린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언덕이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형벌은 가혹한 것이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런 날이 닥칠 것을 알고 지내온 세월이 3년이었으니까 이 날의 고통이 단순히 이 한날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고” 또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고통은 이렇게 예수님한테도 피를 말리고 살이 떨리게 하는 아픔이었다. 문제는 이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예수님이 겪었다는 점에서 그분이 겪었던 고통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인간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대신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이 겪는 아픔을 친히 겪었던 것이고 인간이 겪는 아픔과 고뇌를 친히 대신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이 핏방울이 되고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도록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를 철저하게 외면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의 백미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에 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은 선한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엄청난 효과가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지난 2천 년간 셀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이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바울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일이 없지만, 현세적 슬픔은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고후 7:10)고 하였다.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고통은 인간들의 반역을 치유하는 도구이다. 고통은 인간의 교만을 치유한다. 고통은 인간의 욕심을 치유한다. 고통은 속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을 바라보게 한다.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은 유대인으로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썼는데, 그의 책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매달린 채 20여분 이상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 위젤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엔도 슈사쿠는 그의 소설 <침묵>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였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존재하시는 목적이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분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증에는 진통제나 교감신경 파괴와 같은 의술의 도움이 약이 되지만, 고통에는 사랑이 약이다.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교우 친구 이웃의 사랑과 관심과 기도는 고통에 가장 효과가 큰 치료약이다.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고통은 줄어든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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