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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7]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전망2(행 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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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013 2014.07.0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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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7]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전망2(행 25:1-27)

바울의 구금기간

총독 벨릭스는 천부장이 내려오면 판결을 하겠다고 해놓고 2년이 지나도록 재판을 속개하지 않았다. 벨릭스가 바울을 2년이 지나도록 억류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비난과 혹 있을지도 모를 폭동을 피하기 위한 술책이었고, 둘째는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을까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벨릭스는 해방노예로서,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증언대로,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근성이 있었던 자였다. 벨릭스는 가끔씩 바울을 불러 설교를 듣곤 했지만, 뇌물을 바라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거나 돈을 주면 석방시켜주겠다는 암시를 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율리아(Julia)법은 돈을 받고 죄수를 풀어주는 것을 금하였다. 이를 위반하면 관직에서 쫓겨나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바울은 주후 58-60년까지 2년간 가이사랴 감옥에 미결수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2년의 기간은 일중독에 빠진 자신을 돌아보고 누적된 심신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위기 뒤에 찾아온 기회였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구금의 위기를 로마로 가는 기회로 삼았다. 그에게 위기와 기회는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위기가 올 때마다 그 배후에 숨겨진 보물 같은 기회를 찾아내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이것이 바울을 전무후무한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한 비결이었다.

바울은 주후 60-62년까지 로마의 셋집에서도 미결수상태로 구금되었다. 그가 구금된 기간은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합계 4년이었다. 이 기간이 꾀 길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요 미결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거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는데 별 방해가 없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 4년간 제한적이었지만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또 바울은 이 4년간 많은 서신을 썼을 것으로 추측되나 아쉽게도 남아 있는 옥중서신으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뿐이다. 그리고 이 서신들이 가이사랴에서 쓰였는지, 로마에서 쓰였는지, 혹은 그 이전에 에베소감옥에서 쓰였는지는 아무도 단정지울 수 없다. 다른 한편 누가에게도 바울이 구금된 4년의 기간은 훌륭한 기회였다. 누가는 이 기간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목격자들로부터 증언을 청취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선별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벨릭스의 후임자인 보르기오 베스도는, 요세푸스에 의하면, 벨릭스에 비해서 성실하고 유능했으며, 비교적 선량한 총독으로서 공정한 통치에 힘썼고, 강도들을 제거하는 일에도 힘썼다고 전한다.

벨릭스가 유대총독으로 재임한 기간은 주후 52년부터 60년까지 대략 8년간이었다. 그가 소환된 이유는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분쟁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도시들에서 헬라인과의 분쟁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로마의 관리들이 헬라인의 손을 들어주는 경향이 있어서 유대인들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컸다. 가이사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표를 파견하여 황제에게 상소하였고 이로 인해서 벨릭스의 소환이 이뤄졌다. 그의 소환과 새 총독의 부임으로 인해서 바울에게 가이사랴를 떠나 로마로 갈 돌파구가 생겼다.

베스도 앞에서의 재판

벨릭스가 파면되고 주후 60년경에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베스도는 벨릭스와는 달리 유대인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베스도는 유대인들이 집요하게 집착하는 바울의 처형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신임이었고 임기를 잘 마치려면 유대인들의 협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베스도가 자기들의 약점을 파악하기 전에 또 자기들의 협조가 필요한 임기 초에 바울을 처형하려고 총력을 기우렸다. 따라서 그들은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하루를 쉬고 삼일 째 되는 날에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의 처형을 도와달라고 집요하게 졸랐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제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단검단원들을 길에 매복시켰다가 습격하여 바울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8-10일 정도를 머문 후에 유대인들의 유력자들과 함께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바울을 불러 즉시 재판을 열었다. 벨릭스 때와 똑같이 유대인들은 중대한 죄목들을 나열하며 고발하였으나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이 재판을 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속보이는 음모와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하는 베스도의 어리석음 때문에 부득이 네로 황제에게 상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벨릭스의 불의한 처신 때문에 이미 2년을 감옥에서 허송하였다. 유대인들이 저토록 집요하게 나오는 이상 또 베스도까지 어떤 불공정한 판단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대제사장은 파비(Phabi)의 아들 이스마엘이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벨릭스 통치 말기에 이스마엘로 하여금 아나니아를 이어 대제사장직을 승계시켰기 때문이다. 누가가 대제사장을 복수로 지칭한 것은 주전 586년 유다왕국의 멸망이후 대제사장직은 더 이상 종신직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자주 바뀐 권력자의 시녀에 불과하였으나 백성은 전임과 후임 모두를 대제사장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공민권에 대한 율리우스의 법’은 관원들이 로마시민을 죽이고 채찍질하고 쇠고랑을 채우거나 로마시민에게 상소에도 불구하고 형을 선고하거나 로마시민이 정해진 시간 내에 상소제기를 위해 로마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서 바울은, 황제의 대리자인 총독의 하급심을 신뢰할 수 없게 되자, 로마시민권자의 권리로써 상급심에 호소하여 로마로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속주민들에게는 이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베스도는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자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낼 수가 없게 되었다. 베스도는 로마의 공명정대함을 해칠까 두려워서 바울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수가 없었고, 또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그를 풀어줄 수도 없었다. 그는 그의 법률 고문들과 협의한 후 바울이 상소한 대로 로마로 호송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의 재판

며칠이 지난 뒤 아그립바 2세가 여동생 버니게와 함께 베스도에게 인사하려고 가이사랴에 왔다. 헤롯 궁에서 여러 날 머무는 동안 베스도가 바울에 대한 고발 사건을 왕 앞에 꺼내놓았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유대인의 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문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그립바 왕도 바울을 심문하고 싶어 했으므로 또 재판이 열렸다. 베스도는 왕에게 24-26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예루살렘에서나 여기서나 더 이상 살려 두면 안 된다고 빗발치게 고발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사형을 받을 만한 죄는 하나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황제께 상소하였으므로 그를 로마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일을 황제께 보고할 분명한 자료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서 황제께 써 보낼 어떤 단서를 얻을까 해서 그를 왕 앞에 세웠습니다.

여기서 베스도는 바울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후 아그립바 2세도 바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다. 본디오 빌라도와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듯이, 총독 서기오 바울, 총독 갈리오, 총독 벨릭스, 총독 베스도, 왕 아그립바 2세, 천부장 루시아, 그 누구도 유대인들의 고발과 고소에 대해 바울한테서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23:29)를 찾지 못하였고, “사형을 받을 만한 죄는 하나도 짓지 않았다”(25:25)고 판단하였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주후 44년에 그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 17세의 나이로는 문제 많은 유대지방을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지명되지 못하다가 칼시스의 왕인 삼촌 헤롯이 주후 48년에 죽자, 그의 작은 왕국을 물려받았다. 주후 52년에 유대의 대제사장들을 임명할 권리와 또 매년 대속죄일에 입는 대제사장의 예복을 보관하는 권리도 부여 받았다. 53년에는 이 작은 왕국을 내어 주고 대신 빌립의 분봉과 루사니아의 분봉을 포함하는 더 큰 영토를 받았다. 이 영토는 3년 후 네로가 갈릴리 호수 주변의 도시들과 고을들을 덧붙여 줌으로서 더욱 확장되었다.

버니게(Bernice)는 아그립바 2세보다 한 살 아래인 누이동생이었다. 버니게는 칼시스의 헤롯인 삼촌의 아내였는데, 당시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녀의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버니게는 드루실라보다 인물이 못하여 늘 드루실라를 괴롭혔다고 전한다. 드루실라가 아지주스를 버리고 벨릭스와 결혼한 이유 중에 하나가 버니게의 괴롭힘 때문이었다고 한다. 버니게는 주후 66년에 발발한 유대-로마전쟁을 막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 기간 동안 나실인의 서약을 하면서까지 총독 플로루스(Florus)의 유대인 학살을 막으려고 힘썼으나 허사가 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극렬분자들은 그녀와 아그립바의 궁궐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후로 그녀는 로마를 지지하게 되었고, 전쟁 말에는 나중에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주후 75년 아그립바와 함께 로마에 갔을 때 79년에 황제가 된 티투스의 정부가 되어 그와 함께 살았다. 티투스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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