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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8]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8(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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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965 2013.03.12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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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8]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8(눅 19:1-10)

간절함

누가복음 19장 1-10절에 소개된 세리장 삭개오이야기는 앞서 소개된 맹인이야기와 연결된다. 맹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묻고 알고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고 간절히 호소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비를 입고 눈을 뜬 것처럼, 삭개오에게도 맹인과 같은 그런 간절함이 있었다.

1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도착하신 것을 일러준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이끈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방랑을 끝내고 가나안땅 가운데 가장 먼저 정복한 곳이다. 예수님도 긴 광야 길을 끝내시고 이곳 여리고에 입성하시어 의미 있는 구원사역을 펼치셨다.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장 삭개오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여리고성 정복이 가나안정복의 첫 열매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여리고 사역은 그리스도의 평화군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행 1:8) 복음의 증인이 될 예시(豫示)였다.

여리고는 요단강 하류에 있고,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여서 오렌지, 바나나, 대추야자 등 온갖 작물이 풍성한 곳이다. 유대광야근처에 이런 오아시스가 있다는 게 신기할 다름이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30킬로미터이며 오르막길이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60미터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까지의 고도가 무려 1020미터에 이른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제주공항에서 한라산 1100고지휴게소까지의 거리와 맞먹는다.

이곳 여리고에 세리장 삭개오가 있었다. 당시 세리들은 공공의 적이었다. 회당출입이 금지될 정도였다. 유대인이자 세리였던 마태는 “세리와 죄인”을 세 번, “세리와 창녀”를 두 번, “이방인과 세리”를 한번 기록하였다. 헬라인이자 이방인 선교에 헌신했던 누가는 “세리와 죄인”을 세 번 기록했으나 “세리와 창녀” 및 “이방인과 세리”는 생략하였다. 마태복음에 세리에 대한 모멸적 표현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다양한 것은 마태가 모멸을 당했던 당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세리를 창녀와 이방인과 함께 죄인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에 이방인이었던 누가는 세리를 죄인으로만 취급하고, 창녀와 이방인의 범주에는 넣지 않았다.

로마시대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내는 반 세겔(이틀치 노동품삯)의 세금과 십일조 이외에 로마가 물리는 각종 세금들을 내야했다. 그 가운데 인두세가 있었는데 12세(혹은 14세)부터 65세까지 한 데나리온씩(하루치 노동품삯) 바쳐야 했다. 유대인에게 로마에 인두세를 바치는 행위는 이방인에게 맹종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수치스런 일이었다. 따라서 세리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세리직은 월급을 주지 않는 도급제였다. 세리는 세금을 거둬들여 할당된 금액을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 제몫을 챙겼다. 할당액보다 많이 거둘수록 세리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는 구조였다. 2절은 삭개오가 세리장이며 부자라고 소개하였는데,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3장 12-1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충고하기를,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했다. 이는 그들이 할당된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거둬 착복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과도한 세금부과는 유대인들이 세리들을 혐오한 또 다른 이유였다.

목마름

‘삭개오’란 이름은 ‘의인’(zaccai)이란 뜻이다. 에스라 2장 9절과 느헤미야 7장 14절에서는 ‘삭개’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150-c.215)에 의하면, 삭개오는 나중에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보기 위해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은 그가 지닌 사회적 신분으로 볼 때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3절에서 “보고자 하되”는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 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이 많았고, 키가 작아서였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다”는 말씀은 그에게 예수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4절에서 “앞으로 달려갔다”는 장애를 극복할만한 목마름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이,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심겨진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했고 “앞으로 달려가” 나무에 올라갔다.

돌무화가나무는 뽕나뭇과 속하는 나무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정확히 돌무화과나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지중해를 끼고 있는 터키에는 아름드리 뽕나무들이 가로수로 심겨줘 있다. 여리고 길가에 심겨진 뽕나무 혹은 돌무화과나무도 삭개오가 타고 올라갈 만큼 충분히 큰 나무였다.

그의 목마름은 예수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의 간절함은 자비를 입기에 넉넉하였다. 5절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6절에서 삭개오는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만, 7절에서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집에 들어간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보다 죄인과 식탁교제를 가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 죄인과 세리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았거나 가난 때문에 유대교의 ‘카샤룻’ 음식법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세리들은 부유했지만, 로마정부를 위해서 일하던 자들이었던 만큼 음식법과 같은 율법의 규례들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부정한 자들이었고, 부정한 자들과의 접촉이나 식탁교제는 율법의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법들은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랍비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울타리 법들이고 계명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음식법이나 안식일 법들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안식일 날 회당에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과 동일한 ‘손 내밀기’와 ‘생명구하기’였다. 삭개오에게는 마음의 병이 있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병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다. 삭개오는 마음의 병을 간절히 고침 받고 싶어 했다. 그는 예수님께 손을 내밀고 있었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으셨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었다. 남을 비방하고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구하는 살림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 이웃의 내민 손을 잡아줄 때 능력이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난다.

자기 찾음

삭개오는 자신의 내민 손을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잡아 주셨을 때, 마치 베드로가 5장 8절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고 한 것처럼, 8절에서 예수님께 말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1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선한 사마리아인비유가 있다. 여기에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여리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여리고 사람 삭개오로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 정신적으로 거의 죽게 된 사람이었다. 강도에게 옷을 빼앗기듯 질적인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이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다행히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 사람을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손을 잡아준 누군가가 있어 강도만난 자가 살아났다. 그는 그 사실을 소중히 간직했을 것이고, 자기처럼 강도만난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아줬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 메마른 세상을 적신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란 사회적 지위도 있고 돈도 많았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였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매국노니 죄인이니 하는 따위의 손가락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명분보다는 부를 택할 만큼 충분히 실리적이고 공리적이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음부에라도 갈 사람이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오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에게는 늘 뭔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것을 채워보려고 삭개오는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잡은 것이 없는 빈 배였다(5:5). 그가 부자였다는 것 빼고는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가련한 인생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조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삶의 깊이와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어부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듯이, 또 세리 마태를 부르셨듯이, 삭개오를 부르셨다.

삭개오의 공허한 인생은 인간들의 오랜 외로움의 상징이다. 삭개오의 공허한 인생은 인간들의 오랜 목마름의 상징이다. 삭개오의 공허한 인생은 인간들의 오랜 헛수고의 상징이다. 삭개오의 공허한 인생은 인간들의 오랜 출렁임의 상징이다. 삭개오의 공허한 인생은 인간들의 오랜 병듦의 상징이다.

10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5장에서 어부들의 빈 배를 채우시고(1-11절), 문둥병자(12-16절)와 중풍병자(17-26절)를 고치시며,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신 후에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27-39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려 회개시키려 왔노라”(27-32절). 예수님의 평화군이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있어야할 곳이 어디인가? 그곳은 건강한 자들의 현장이 아니라 병든 자들의 현장일 것이다. 그곳은 가득 채워진 현장이 아니라, 비어 있는 현장일 것이다. 그곳은 배부른 자들의 현장이 아니라 배고픈 자들의 현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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