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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42]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4(눅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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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840 2013.03.1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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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42]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4(눅 21:1-9)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의 기간은 한 주간이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주로 성전에서 보내셨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뜰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광장이 있었는데 이방인의 뜰이라 불린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곳이 바로 이곳이다(19:45). 이 광장 한쪽에 담으로 둘러싸인 유대인들만을 위한 건물과 공간이 있었다. 미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이곳이 신성한 구역이었다. 바깥 담벼락에 이방인과 부정한 사람이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비문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다. 미문을 통과하면 여성의 뜰이 나온다. 유대인 여성들과 13세 이하의 어린이들도 입장이 허용된 공간으로써 창고로 쓰인 네 개의 모퉁이방과 회랑이 있고, 13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 헌금함은 미문기둥 앞과 모퉁이방 앞과 회랑에 놓여 있었다. 여성의 뜰은 니카노문(Gate of Nicanor)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뜰로 이어진다. 니카노문은 15개의 돌계단 위에 있었는데, 이 계단을 오르면서 부른 노래가 시편 120-134편에 실린 15개의 “성전에 오르는 노래”이다.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 즉 계명의 아들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스라엘의 뜰 안쪽은 제사장의 뜰이었고, 이 뜰에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다. 이 뜰에서 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야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다. 등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놓인 성소에는 안식일 오후에 교대하는 당번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고, 법궤가 놓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매년 속죄일(음력 8월 혹은 9월 10일)에 두세 번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37절) 노숙하셨는데, 보름이 가까운 때여서 달빛이 밝았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곳은 주로 여성의 뜰이었을 것이다(19:47, 20:1). 누가는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다”(21:38)고 적었다. 오전 기도시간에 맞춰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신 곳은 여성의 뜰이었다. 그곳에 나팔모양으로 생긴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는데, 9개는 성전세와 제물대신 돈으로 바치는 함이었고, 나머지 4개는 성전보수와 유지비용을 헌금하는 함이었다. 사람들이 헌금할 때 헌금의 목적과 액수를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이 여성의 뜰에서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과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다.” 그녀에게 두 렙돈은 자신이 가진 것 전부였다. 그녀의 형편을 아신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다.

렙돈(lepton)은 유대인들의 주화로써 로마 돈 고드란트의 2분의 1, 데나리온의 128분의 1, 우리 돈 약 500원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우리 돈 천 원 정도로써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부자들의 헌금과 함께 직전에 언급하신 율법사들의 외식(20:45-47)에 상반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부자들의 헌금과 율법사들의 외식은 건강한 상태인 가난한 과부의 믿음과 헌금에 대립되는 병든 상태의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참과 거짓은 액수의 크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교훈하셨다.

예시된 기독교 박해

누가복음 21장 5-36절은 박해시기, 유대-로마전쟁 및 세상종말에 관한 경고들이 복합적으로 겹쳐있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들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기게 된 가장 큰 목적이 당대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겪고 있는 당면문제들에 대해 신학적인 해답을 제시하거나 신앙적인 권면을 주려는데 있었다. 그래서 복음서 속에는 예수님시대의 사건들과 말씀들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교회시대 즉 저자시대의 사건들과 논쟁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깔려있다. 독자들이 예수님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저자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자기시대의 사람들에게 쓴 서신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을 필요가 생긴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출범과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모세오경을 읽을 때, 예언자들이 자기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한, 대개는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펼친, 예언서들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모세오경의 배후에 깔린 유대교적 신학과 민족주의적 역사이해까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저자시대의 교회들이 당면한 문제란 외부의 물리적인 박해, 내부의 이단침투, 교회가 앓았던 성장통을 말한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에 신학과 제도를 바로 세우도록 요구하였고, 교회는 이들 문제에 잘 대응함으로써 주후 30년에 창립된 지 283년만인 주후 313년에 로마로부터 합법종교로 공인받았고, 392년에는 로마의 국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교회가 설립된 지 한 세대가 지났을 무렵인 주후 60년대에 교회는 이단들의 침투를 받고 있었고, 로마와 예루살렘에서 세기적인 사건들이 터졌다. 이 사건들은 기독교계와 유대교계 모두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것들은 로마 시에서 벌어진 네로의 기독교박해(64-68년)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유대-로마전쟁(66-73년)이었다. 네로의 기독교박해는 비록 로마 시에 국한된 사건이었지만, 로마당국차원에서 시행된 최초의 기독교박해였을 뿐 아니라, 복음서, 베드로전서, 계시록의 기록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유대-로마전쟁은 유대인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참화(慘禍)를 안긴 불행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건이었다.

누가문서의 주제가 배척일 만큼 초기교회는 박해에 직면해 있었다. 교회는 로마당국의 박해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다. 바울의 평생 동역자였던 누가는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박해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미 수십 년 전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북부지방 고향 나사렛에서, 중부지방 사마리아에서, 남부지방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끝내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들 속에 예시되어져 있었다. 누가의 예리한 판단에 따르면, 성령님의 주도하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와 나란히 이어져왔고, 같은 맥락에서 바울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평화군은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이며, 그들이 밟았던 노정은 예수님이 걷고 쟁취하셨던 승리와 영광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은 그분의 모든 제자들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밟아야할 구원의 길이요, 샘플이며, 모범적인 길이었던 것이다.

기로에 선 유대교와 기독교

한편 유대-로마전쟁의 참패로 이스라엘의 모든 정파와 종파들은 소멸되고 오직 바리새파만이 존속되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당시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그의 제자들은 전쟁직후 로마의 허가를 받아 욥바 남동쪽 20킬로미터 지점, 지중해 동쪽 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Japheth) 혹은 ‘얌니아’(Jamnia)란 소도시에 율법학교를 세워 성전을 대신할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생존에 힘을 쏟아부어야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더 이상 탄압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잠재적 위험요소로 보고 회당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파문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85년경이었다. 그들은 사라진 성전제사를 대신해서 하루 세 번 기도시간에 바치는 18개의 기도문(쉐모네 에스레이)에 “이단을 공격함”이란 제목의 기도문을 12번째에 첨가하여 기독교로부터 유대교를 보호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을 회당에서 추방시키는 노력을 펼쳤을 뿐이다.

다른 한편 유대-로마전쟁의 참패로 인한 예루살렘교회의 폐쇄와 야브네 회의의 파문결정으로 세력이 약화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교회들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주후 30년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거의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야고보 장로가 수장이었다. 이방인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유대교에 완전 개종했거나 절반 개종한 하나님 경외 자들이었다. 또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지만 여전히 유대교회당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예수님의 경고,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라”(20-21절)는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 동편의 ‘펠라’와 ‘페트라’로 피신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예루살렘교회는 더 이상 이방인 교회들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로마전쟁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핍박과 유대인 기독교의 간섭에서 벗어나 지금의 기독교가 되는 발판을 제공하였고, 동시에 기독교가 이후 300여 년간 로마당국의 박해를 받는 새로운 위기도 제공하였다.

유대-로마전쟁이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회당의 소속으로 남든지, 아니면 유대인의 민족유산을 다수 포기하고 이방인 교회에 합류하든지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중간에 남은 유대인들에는 ‘나사렛당’(Notzrim)과 ‘에비온파’(Ebionites)가 있었다. 나사렛당은 유대교의 계명들을 준수했지만, 그것들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랍비들이 만든 울타리 법들의 구속력을 부정하였다. 이들은 유대-로마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펠라’와 ‘페트라’로 피신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에비온파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이단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중시한 반면 바울의 글들은 무시했으며, 마태복음만을 복음서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또 예수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였다. 바울이 이단으로 정죄했던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에비온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위기에 매우 강했음을 본다. 위기는 발전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통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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