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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44]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6(눅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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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759 2013.03.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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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44]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6(눅 22:1-6)

가룟 유다의 배반

유월절은 유대인의 광복절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니산월 15일부터 22일 8일째 날까지 지킨다. 이 날은 춘분이 지나고 오는 첫 보름날이다. 예수님이 잡수신 유월절 식사는 우리 시간으로 주후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 유대인 시간으로는 7일 금요일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신지 일주일만인 금요일 저녁에 유월절 식사모임을 가지셨고, 그 밤에 체포되시어 심문 받으셨으며, 같은 날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질 때부터 시작되어 그 다음 날 해질 때까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드시고 동굴무덤에 안치되어 안식하시기까지의 모든 일이 금요일 하루에 다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의 배신음모도 불과 며칠 사이에 긴박하게 이뤄졌다.

기득권층은 메시아의 출현을 두려워했다. 헤롯 안티파스와 그의 불륜 아내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을 두려워도 하고 미워도 하여 살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또 파견된 정보원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추적하고 메시아인가를 여러 차례 시험하며 말의 올무를 놓아 고소거리를 찾아 보고하고 호시탐탐 체포기회를 노렸던 것에서 보듯이, 기득권층은 선지자들을 배척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손에 쥔 부와 명예와 권세를 내려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께서 메시아이신 사실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셨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 죽어야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인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 가룟 유다를 포함해서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은 빼앗긴 가나안땅을 되찾아 주고, 빵문제를 해결해 주며, 다윗 왕국의 옛 영광을 회복시켜줄 메시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메시아가 될 것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가룟 유다의 환멸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의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마귀라 칭하셨고(요 6:70), 요한은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요 13:2)고 적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는 가룟 유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일 수 있고, 세 가지 시험은 유대인들의 요구였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정치군사적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하신 것은 그것이 많은 사람의 피를 부르기 때문이었다. 피를 흘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해도 일시적일 뿐이지, 영원한 안식과 궁극적 평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줄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사랑의 메시아가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강력한 통치자가 아니라 민중의 영원한 반려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민중은 처음부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갖고 싶은 것만 갖고자 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현실문제에 어두운 무력하고 무능한 인간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배신감도 컸을 것이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어설픈 혁명가였을 바라바를 놓으라고 외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룟 유다의 환멸

가룟 유다의 환멸은 유대민중의 환멸을 상징한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유대민중의 배신을 상징한다. 예수님께 얻고자 했던 세속적 욕망을 얻지 못한 우매한 민중의 배척을 상징한다.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Ha-Tikvah)이 좌절되면서 쓰나미처럼 밀려든 환멸은 증오로 돌변하여 배신으로 표출되었다. 이 환멸과 증오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기득권층의 욕망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거래가 그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거래는 마치 급전이 필요한 주인이 자기 노예를 헐값에 팔아넘기듯이 120데나리온에 성사되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이 땅의 것이 아닌 저 하늘의 것,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하고 참된 것,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아닌 정의와 긍휼과 믿음, 전쟁과 혁명이 아닌 평화와 개혁, 분노가 아닌 사랑의 하나님을 교훈하시려고 민중의 기대를 저버린 채 민중의 분노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지려한다는 것을 알고 고뇌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정을 줬던 여인에게 배신과 환멸을 느껴 헤어지려 해도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사내의 마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감과 환멸은 유대민중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소개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가룟 유다의 입을 통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처럼 따져 물었을지도 모른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가혹한 현실에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랍비여, 당신은 사랑보다 큰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보다 지금 당장 효과가 있는 것을 원합니다. 현실에 쓸모 있는 것밖에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고통이 민중의 고통이란 것을 아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불의와 절망에 상처 입은 민중과 함께 계셨고,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를 원하셨지만, 욕망의 신을 섬겼던 민중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이해하셨고 용서하셨으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에 필요한 기적만을 구하지만, 정작 그들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은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풀자가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지 기적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당하셨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셨으며, 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드리기를 원하시는 나라는 일시적이고 허망하며 요동치고 흔들리는 세상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궁극적 평화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세속욕망을 채워줄 메시아를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 또한 머지않아 예수님께 환멸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께 사랑과 자비를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그분의 은혜의 강물 속에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룟 유다의 교훈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와 대립관계에 있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유대교의 병든 상태가 무엇인지 기독교의 건강한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펜을 들었다. 그들은 율법과 복음, 거짓과 참, 형식과 본질, 유대교 메시아와 기독교 메시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선택과 삶을 권면하려하였다.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일 수 있다. 가룟 유다는 병든 상태를 예수님은 건강한 상태를 보여주는 샘플일 수 있다. 가룟 유다는 부와 명예와 권세 때문에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영적으로 병든 유대인들의 대표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 배척당함과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와 성령 충만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이시다.

가룟 유다로 상징되는 병든 사람들은 욕망과 소유의 신에게 사로잡혀 족쇄에 묶인 채 성공주의 공리주의 실용주의란 폐쇄적 동굴 깊숙한 곳에 갇혀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지금 당장 이 땅에서 효과 있고 현실에 쓸모 있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의 실상은 참이 아니라 거짓 것이며,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며,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예수님으로 상징되는 건강한 사람들은 하늘의 것, 영원한 것, 참된 것을 추구하고, 부와 명예와 권세보다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바라며, 전쟁과 혁명보다는 평화와 개혁을 꾀하고, 분노의 신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기본에 충실하고 실체에 접근하며 당장의 효과와 쓸모보다는 사랑과 진리로 궁극에 다가가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악은 아니다. 그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이 욕망이란 주술에 걸려들게 만들고 마약에 취하듯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릴 수 있다는데 있다.

유대민족사의 그늘과 기독교사의 빛은 가룟 유다와 예수님 가운데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독립투쟁, 배타주의, 선민사상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움켜쥐려는 자들의 가면이었을 뿐, 이면에는 피도 눈물도 동포애도 애국심도 없는 독침이었다. 제1-2차 유대-로마전쟁 당시 유대혁명세력은 로마군에 포위된 상황에서조차 주도권을 뺏기 위한 피의 살육을 멈추지 않았고, 불복종하는 자를 즉결 처형하였다. 독립전쟁이란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통을 감내했어야했는지는 전쟁사만이 쓸쓸히 증언할 뿐이다.

유대민족사는 우리민족사를 독립과 친일의 잣대만으로 재는 민족민주자주 운운하는 경직된 역사관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강변한다. 우리는 국민을 볼모잡고 있는 자들의 행동이 병든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국민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지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세계사 속에서 이미 발생했거나 진행 중인 잔혹사들이 권력을 쥐기 위한 동족살육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들에게 민족분열과 멸망, 1천2백만 학살, 노예 살이, 강제이주, 2천5백년의 떠돌이, 이런 엄청난 시련과 피맺힌 한을 누가 안겼는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권력을 쟁취하려한 자들이었다. 가룟 유다의 비극은 유대인들의 비극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리고 있는 영광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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