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온전한 선물이신 예수님(약 1:17)
본문
선하고 온전한 선물이신 예수님(약 1:17)
선하고 온전한 선물로써의 예수님
야고보서 1장 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였다. 이 말씀 속에 성탄의 의미가 담겨 있어서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무엇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인가라는 것이다. 세속적 가치로 보면, 부, 명예, 권세가 해답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병든 것으로 보셨다. 그렇다고 부, 명예, 권세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니고, 그것들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뜻이다. 만일 그것들을 선용할 수만 있다면, 부, 명예, 권세를 갖고서도 건강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다. 부, 명예, 권세는 사람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요한복음에 보면, 한 가련한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남자와 살아봤지만, 자기 남편이라고 꼬집어 말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생수를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은 이미 야곱의 우물에 와있고, 얼마든지 물을 길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 물은 그녀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물은 그녀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될 수 없었다. 여기서 여인을 이스라엘, 다섯 남자를 모세오경, 우물물을 율법(구약)으로 읽게 되면, 율법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이 영생하게 하는 물(복음)을 주실 자로 암시하셨다(요 4:10). 여기서 영생하게 하는 물(복음)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써 예수님을 믿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으면, 돈 없이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했고(행 2:38, 8:20, 11:17), 바울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선물로, 은혜로, 차별없이 받는다고 했다(롬 5:15, 엡 2:8). 이것은 구원과 영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탄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는 가장 선하고 온전한 영생을 위한 선물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살게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있고, 육체의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끝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보듯이 부활(재림)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가치와 상반된 천국의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지만, 그 힘이 미약한 것은 본능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본능의 힘이 워낙 강해서 그렇다.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제 힘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이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도록 하셨다. 그 대신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도록 정하셨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둘째, 무엇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인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들”을 말한다. 태양은 그 크기가 지구의 109배에 달한다. 지구를 콩알에 비교한다면, 태양은 농구공정도가 된다. 그 태양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는 것, 그 태양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또 태양은 대략 1억 5,000만 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먼 곳에 있어서 초속 30만 킬로미터인 빛의 속도로도 8분 20초나 걸린다. 우리가 쬐고 있는 태양 볕이 500초전, 과거의 것이란 이야기이다.
태양은 불타고 있는 거대한 항성이다. 그렇다고 빛과 그 빛의 열이 태양이 내뿜고 있는 불 때문은 아닐 것이다. 과학자들은 빛과 그 빛의 열이 태양이 쏘는 광선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 태양광선에 빛이 있거나 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태양광선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직진밖에 못하는 바보이다. 이 보이지 않는 광선을 보이게 하는 것이 빛인데 빛은 직진만 하던 광선(입사광)이 불투명한 물체에 닿아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져 만들어지는 것으로써 반사광이라고 부른다. 잘 아시다시피, 이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무지개와 같은 여러 색의 띠가 나타난다. 또 프리즘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들도 있는데, 빨간색 광선의 바깥쪽에 적외선이 있고, 보라색 광선의 바깥쪽에 자외선이 있다. 그리고 열은 광선이 물체를 통과할 때 경계면에서 꺾이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것을 굴절이라고 하는데,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생기는 무지갯빛도 굴절현상의 하나이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적고 있다. 이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은 태양광선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를 통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는데, 계시들 가운데 가장 선하고 온전한 계시가 예수님이시다. 이 예수님은 태양광선의 반사광에 해당된다. 보이지 않던 광선이 물체에 반사될 때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빛들의 아버지”이시고, 그 속에 무지갯빛처럼 아름다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반사광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것들이 인류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시라고 말한다. 빛의 역할에 대해서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반사광이신 예수님이 어떤 빛이신지를 몇 가지만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는 계시의 빛이시다. 요한복음 1장 18절이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인류에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여주신 분이시다.
둘째는 생명의 빛이시다. 어둠과 혼돈과 죽음을 몰아내는 생명의 빛이시다.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의 빛이시오, 긍정과 살려냄의 빛이시며, 믿음과 승리의 빛이시고, 인생역전과 삶을 위대하게 하는 빛이시다.
셋째는 구원의 빛이시다. 성탄이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이 되고,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마 4:16)“이 되시며,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 되는 이유이다. 성탄으로 인해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로써의 예수님
셋째, 무엇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인가라는 것이다. “위로부터 ... 내려오는” 선물을 말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임재의 사건,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사건이다(마 1:23).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위하시며 소통하고 싶어 하시는지를 알게 해주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과 짧은 생애는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토록 하는 특별하고 온전한 선물이 되었다. 예수님 당대에도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천국이었다. 영육 간에 병들고 상처 입은 자들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것이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평화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임재가 껄끄럽고 불만인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자들 때문에 지옥이 되어간다. 악의 사슬을 끊어낼 방도를 이야기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해서 장황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조차도 속마음으로는 남들보다 더 큰 부와 명예와 권세를 좇기 때문에 좋은 세상을 꿈꾸는 힘없는 사람들은 항상 이용만 당한다.
종교인이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세상일 것이다. 인간들의 욕망이 투영된 하나님이 아닌, 참 하나님이 계신 곳이면, 그곳이 바로 지성소이고,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이며, 평강과 안식이 있는 천국일 것이다. 반대로 참 하나님이 없고, 설사 있더라도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거짓 하나님만 있다면, 그곳은 악한 곳이고, 불의와 불평등이 지배하는 곳이며, 폭력과 고통이 판치는 생지옥일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한 곳이면 선한 곳이고, 사단이 판치는 곳이면 악한 곳인데, 시간과 공간적으로 본래부터 선한 곳이나 악한 곳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지성소나 천국은 사람들이 지정한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아닐 것이다. 신약성서는 사람이 만든 것이 하나님일 수 없듯이, 사람이 만든 성소조차도 참 것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하였다(행 19:26, 히 9:24).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행 7:48).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 답을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에서 얻을 수 있다. 흔히 예배를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배가 거룩한 것은 장소나 의식이 거룩해서도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해서도 아니다. 예배가 거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일 때이다. 그러면, 어떤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는가? 예배당에서의 예배의식은 삶에서 드려질 참 예배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예배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혼신의 삶으로써 예수님이 바친 예배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그분을 닮아간다면, 그분처럼 엄청난 긍정의 효과를 거둘 수는 없겠지만, 태양광선을 반사하는 달과 별처럼, 혹은 밤을 밝히는 전등처럼 희미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을 느끼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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