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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8]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4(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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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813 2014.01.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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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8]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4(행 2:37-47)

새 언약 백성의 새 이스라엘

사도행전 2장 37-41절은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 새 언약 백성, 새 이스라엘이 어떻게 출범했는지를 보여준다.

37절은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들이 취할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를 묻는 구절이다.

38절은 베드로의 대답이다. 베드로는 세 가지를 더 주문하였다. 죄를 회개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표준새번역, 공동번역)로 받게 된다고 말했다. 듣고, 믿고, 회개하고, 침례 받으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한 것이다. 38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는 어떤 오순절 교단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름”만(2:38, 8:16, 10:48, 19:5)으로 침례를 베풀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에서 침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리스도인에로의 개종을 뜻한다. 그래서 이 침례를 '그리스도인침례'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침례’는 세례 요한의 ‘회개침례,’ 동시대 엣세네파의 ‘정결침례,’ 유대교의 ‘개종침례’와 구별된다.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이 없는 유대교인과 구별된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의 일차적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가족이요, 그분의 나라의 시민이며, 그분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인 것을 보증하는 인감과 선수금의 역할이다.

39절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은총을 입는 사람의 숫자에 제한 없다는 것, 거저 주신다는 것, 믿기만 하면 얼마든지 주신다는 뜻이다.

41절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침례 받는 이 다섯 가지 과정을 거쳐, 죄 사함과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오순절 날 하루에만 3천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인류 최초인 예루살렘 그리스도의 교회의 창립멤버였다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들이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것만 추가로 믿으면 개종침례를 받을 수 있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렇더라도 이들 3천여 명이 베드로로부터 단 한 차례의 설교를 듣고 한꺼번에 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고, 하루 동안에 얻어진 결과를 말한다.

사도들은 세례 요한처럼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침례를 베풀었던 경험자들이었다(요 4:2). 사도가 아닌 제자들도 100여명이나 있었다. 또 당대 예루살렘에는 실로암 못, 베데스다 못, 성전 산 저수조, 히스기야 못, 뱀의 못, 마미라 못, 이스라엘 못, 스트루티온 못, 비르켓 시티 미리암 못을 비롯해서 10개 이상의 큰 못이 있었다. 이밖에도 100여개의 의식용 연못이 있었는데, 발굴된 것만 48개나 된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3천여 명이 하루에 침례 받을 수 있는 충분한 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새 언약 백성의 새 예배(1)

사도행전 2장 42절은 신생 새 언약 백성의 새 이스라엘이 어떤 내용으로 예배를 드렸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예배의 원형이며, 우리가 소위 ‘정경’이라고 말하는 사도전통이다. 여기에 언급된 것은 “사도의 가르침(설교),” “교제,” “떡 뗌” 그리고 “기도(찬양)”이다.

새 언약 백성의 새 예배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을 재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사도들의 가르침” 즉 말씀예배로 표현되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이 “떡 뗌” 곧 주의 만찬예배로 표현된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는 의미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연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 그리스도의 교회예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말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사도의 가르침(말씀)”과 “떡 뗌(주의 만찬)”이 복음을 운반하는 두 가닥의 선로라면, “교제(헌금)”와 “기도(찬양)”는 선로를 떠받치는 침목들에 해당된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서로 동일하게 중요한 동등한 요소들이다. 같은 것에 동일한 것들은 서로 같다(Things that are equal to the same thing are equal to each other)는 기하학에 따른 것이다. 사도들이 어느 것을 더 힘쓰고 어느 것은 덜 힘쓴 그런 것들이 아니라, 동일하고 동등하게 힘썼던 예배의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예배순서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예루살렘 사역에서 완성되듯이, 말씀예배는 주의 만찬예배에서 완성된다. 이 형식의 주일 예배가 그리스도의 교회예배의 원형이다.

그런데 주의 만찬을 자주 하면 경건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의 만찬을 매주하면 너무 흔해빠진 것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예배를 자주 드리면 경건성이 떨어지고, 예배를 매주 드리면 너무 흔해빠진 것이 되는가? 매주일 설교하면, 매주일 헌금하면, 매주일 찬양하면, 매주일 기도하면, 매주일 봉사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고, 너무 흔해빠진 것이 되는가? 동일한 기도문을 매일 세 번하는 유대교인들의 기도는 경건성이 떨어지고, 너무 흔해빠진 것이 되는가? 주기도문을 매일 세 번 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는 경건성이 떨어지고, 너무 흔해빠진 것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것들은 자주 할수록 성도에게 유익한 경건의 훈련이 된다. 오히려 주의 만찬이 예배에서 소홀히 취급되면, 그 예배는 불완전한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서 카인의 예배처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는지 모른다.

유대인들은 회당모임을 예배라고 하지 않고 기도회라고 말한다. 성전에서 바치는 제사만이 예배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하루 세 번 성전에서 바치던 제사를 대신할 기도문(베라코트)을 만들었다. 그것이 ‘쉐모네 에스레이’인데 하루 세 번 모이는 기도회 때 낭송한다. 같은 맥락에서 주의 만찬이 빠진 그리스도의 교회모임은 예배가 아니라 기도회에 불과하다는 것이 예배신학자들의 주장이다. 매주일 행하는 주의 만찬은 예수님의 십자가희생을 대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예배의 본론에 해당된다.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상황에 따라서 새벽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예배를 드렸고, 일과 후 저녁에 다시 모여 “떡 뗌”예배를 드렸다. 이 주의 만찬은 구원받은 자들이 참여할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는 의식이고,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은 입교인만이 참여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침례를 받기 위해 학습 중인 신자들은 “떡 뗌”예배에 참여하지 못했다.

새 언약 백성의 새 공동체 정신

43절은 성령님의 강한 능력이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움 또는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무렵에 나타난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유배이후,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떠나고, 바벨론제국이 침략하여 성전을 능욕함으로써 하나님의 세키나(계시, 영광)가 떠난 이후 6백년 넘게 보지 못했던 사건들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위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기적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므로, 오순절 날 직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또 교회가 이제 막 출범한 신생공동체이므로 사람들이 박해를 두려워했다고 보긴 어렵다. 사도들이 큰 능력을 행하고 있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두려움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며(이 현상을 “기사”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공동체에 합류하는 자들이 많아졌을 것이다(이 결과를 “표적”이라 말한다).

44-45절은 신생 그리스도의 교회공동체가 유무상통(有無相通)했다는 기록이다. 당대 사해근처에는 쿰란공동체와 엣세네공동체가 있었다. 그들은 집단생활을 했고, 모든 것을 유무상통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산사회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았고, 통제와 엄격한 규율에 묶인 유대교공동체였다. 그렇지만, 교회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인정하였고, 정상적인 일상생활 중에 기도회 시간에 모이는 공동체였다. 실제로 이런 상태에서는 유무상통이 거의 불가능하다. 지난 2천년의 교회사 속에서 사도행전 2장에 영감을 받아 추진된 공동체운동이 수없이 펼쳐졌었지만,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속성상, 욕망과 욕심에 절여진 본능의 속성상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국가들이 혁명이후 70여년 만에 모두 붕괴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도시대의 유무상통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에게서 나타난 성령님의 역사가 워낙 강했고, 이를 본 사람들이 경외감, 신비감,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강력한 성령님의 능력은 새 언약 공동체의 새 이스라엘인 교회창립과 새 언약 법인 신약성서기록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모세시대이후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신의 강력한 외적 능력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과 같다. 이후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권능이 나타난 것은 위기에 빠진 북왕국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유무상통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구제에 힘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이후 체계적인 구제(자선)사업으로 발전되었다.

46절은 솔로몬 행각에서의 기도모임과 애찬에 관한 내용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라는 말씀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매일 세 번 기도회 시간에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뜻이다. 또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는 애찬을 통한 친교를 말한다. 이 애찬은 나중에 주님의 만찬의식으로 단순화되었다.

47절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실천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칭찬을 받기에 충분했으며, 이로 인해서 교회가 나날이 부흥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부흥의 길이 없다는 것을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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