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12]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8(행 4: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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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12]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8(행 4:13-37)
새 출애굽의 희망(하티크바)
당대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지성들로 구성된 70인 공회에 어부출신의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을 받기 위해 섰다. 갈릴리 촌놈들이 공회원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했고, 말에 거침이 없었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기적에 놀랐던 공회원들은 무식쟁이로 알았던 그들의 거침없는 언변에 또 한 번 더 놀랐다. 그들은, 14절에서 보듯이,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고” 또 일어난 표적을 부인할 방법도 없었다. 그들을 그저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책이 없었고, 굳이 있다면, 18절의 말씀처럼,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위협하는 정도였다. 공회원들이 앉은뱅이가 일어선 사건을 반길 수 없었던 것은 그 같은 희망적이고 종말론적인 사건은 그들이 누리는 세도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21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고 한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계시(세키나 영광)를 보지 못했다. 바벨론 유배이후 6백 년째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았다. 그들 모두는 죽음과 고난을 상징하는 40년 세월을 앉은뱅이로 살았던 그 불쌍했던 사람의 신세와 같았다. 22절,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다.”는 말씀이 그런 정황을 말해준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사건은 눈물과 한숨으로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살아야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남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버려졌던 ‘아세셀’을 위한 염소처럼, 조상들의 잘못을 온몸에 짊어지고 사막생활처럼 고달픈 삶을 살아야했던, 그래서 앉은뱅이처럼 제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했던, 그런 그들에게 이제는 일어설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으며, 뛸 수도 있다는,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티크바’(희망)를 보게 해준 사건이 바로 이 앉은뱅이 사건이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의 나이가 40여세나 되었다는 구절 속에 이런 암시가 숨어있다. 마태복음 1장의 40세대 족보에 숨어있는 암시와 같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이스라엘왕국의 출범과 절정기까지를 말하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왕국의 쇠퇴기와 멸망까지를 말한다. 마태는 인간의 오랜 고독과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천년시대를 여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속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것은 인간왕국이 멸망한 이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왕국의 개벽이었다. 그것은 노예와 떠돌이였던 유대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쟁취한 가나안 땅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지만, 다 빼앗긴 후 또 다시 예전의 노예와 떠돌이의 신세로 돌아간 다음에, 그들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활짝 여신 그리스도왕국의 출범이었다. 그 시작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요,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범이었다. 이것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 담고 있는 메시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
19-20절에서 보듯이,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응수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새천년시대를 꿈꾼 모든 사람들의 담대함이기도 하였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교황청 대사 카예탄 추기경의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에 내건 면죄부 남용을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거부하였다. 목숨을 담보한 투쟁이었다. 1518년 10월 12-15일의 이 심문에서 추기경은 루터에게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복하라고 위협하였다. 이에 루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권위는 교황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그로부터 3백년 후인 1807년 10월 27일, 토마스 캠벨은 "신조들과 신앙고백서들의 권위는 인위적이다."라고 가르친다는 비난을 장로회로부터 받고 1808년 2월 9일, 이렇게 해명했다. “믿음의 주제는 사람의 영혼이고, 믿음의 저자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믿음의 규칙과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시며, 믿음의 목적은 용서와 수용과 도움과 은혜와 영광이다.” 1808년 9월 18일 장로회를 탈퇴한 후에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한다."(Where the Bible speaks, we speak; where the Bible is silent, we are silent.)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선 땅에서도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 박해로 일가족이 순교를 당한 가문이 있었다. 이 집안이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네였다. 조카인 정하상은 우리나라 최초로 기독교변증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였는데, 그는 이런 변증을 하고 있다.
지위에는 높낮음이 있고 일에는 중하고 가벼운 것이 있으니 집안의 아비가 가장 중하나 집안의 아비보다 높은 이가 나라의 임금이요, 나라 안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더 높은 이는 천지의 큰 임금입니다. 집안의 아비의 명을 듣고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고 천지대군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 그 죄는 더욱 커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김이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것이 아니요 부득이 한데서 오는 것인데 이것을 들어 부모와 임금을 업신여긴다 함이 옳은 말이옵니까?
모세가 바로의 명령을 거부한 것도,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의 명령을 거부한 것도, 다니엘이 황제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던”(6장:10) 것도 다 같은 맥락, 즉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5:29)는 개혁가들의 일관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고 세상을 향해서 외쳤다.
유토피아 공동체
32-37절은 가장 이상적인 신앙공동체, 그러나 지속될 수 없는 유토피아에 관한 말씀이다. 그것이 지속될 수 없는 현실은 바로 이어지는 5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행하는 큰 권능으로 인해서 32절에서처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1971년 후반기 6개월 동안 시골에서 농사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관제 잡지였던 <새 농민>을 틈틈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는 협동조합의 창시자였던 로버트 오웬의 삶을 다룬 짧은 전기였다. 유년기에 오웬이 집을 떠나 고생했던 이야기며, 협동조합을 만든 과정 등에 매료됐었다. 그 덕분에 오웬은 내 의식 속에 살아남게 되었다. 10여년 후 미국에서 환원운동사를 공부하던 중에 그가 19세기 종교개혁가 알렉산더 캠벨과 만나 토론을 펼쳤던 도시에서 내가 공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무신론자요,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유년기에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을 당했던 한 “외로운 이리”가 무신론의 대부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이 “외로운 이리”는 내 의식에 살아남아 늘 나에게 “외로운 이리”처럼 씩씩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무신론자였고, 환경결정론자와 사회주의자였던 것에 작은 파동이 내 마음에 일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던 오웬은 1825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New Harmony)에 유토피아 공동체를 세워 성공시킨 후에 전 세계를 세속 국가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가 꿈꿨던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통제된 인간사회였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동물이므로 철저하게 환경을 통제해야한다고 보았고, 아이들을 종교적 미신으로부터 철저히 차단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공동체 실험은 2년도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웬과 오웬파 운동의 지도자들은 목회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방어해볼 테면, 한번 방어해 보라는 식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래서 당대의 뛰어난 지성이요 토론자였던 알렉산더 캠벨이 오웬과 미국 오하오 주 신시내티에서 1829년에 만나 주일을 뺀 8일간의 격론을 펼쳤다. 그러나 오웬은 캠벨의 반론에 답변을 하지 못한 채, 환경결정론을 지지하는 12개의 “인간 본성의 기본법들”만을 반복해서 설명할 뿐이었다. 결국 캠벨은 신의 존재를 존재론적 방법으로 입증하는데 성공하여 1200여명의 방청객 가운데서 오직 세 명만 뺀 나머지 모두의 지지를 받아냈고, 이로써 그의 명성은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2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식 인간 공동체는, 그것이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삼는다고 해도, 이 땅에서는 성공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바울이 지적한바와 같이 인간의 연약함, 육체의 약함, 육체의 죄의 성질, 본능의 특성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으로나마 초대교회 공동체가 유무상통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창립 초기에 있었던 강한 성령님의 역사, 즉 사도들의 손으로 행해지는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시적인 현상은 제2,3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선단체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심지어 국가의 복지정책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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