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13]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9(행 5:1-16)
본문
[행강13]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9(행 5:1-16)
새 예배전통
사도행전 4장 32-35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고” 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배고픈 사람이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된 경위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에게 주었고,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주후 30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창립되고 100년쯤 지난 때에 사마리아에 저스틴이란 사람이 태어났다.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에서 교회교사로 섬기다가 주후 168년경에 순교하였다. 그는 150년경에 로마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변증서>를 써서 기독교를 변호하려고 하였다. 이 글 67장에 헌금에 관한 언급이 있어서 소개한다.
재물이 있고 뜻이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의향대로 그가 원하는 것을 내고, 모아진 것을 집례자에게 갖다 줍니다. 집례자는 이 헌물을 고아와 과부와 병이나 다른 이유들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또한 감옥에 갇혀 있는 자나 나그네들에게도 나누어줍니다. 한마디로 집전자는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보호자가 됩니다.
이 글은 사도행전에서의 유무상통이 100년쯤 후에는 주일 헌금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사도들을 대신해서는 집례자(장로나 감독)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변증서>에 따르면, 성서봉독, 설교, 기도로 이어지는 제1부 말씀의 예배가 있었고, 이어서 인사(평화의 입맞춤), 봉헌(빵과 물이 희석된 포도주), 성만찬기도, 응답(아멘), 분병과 분잔, 헌금으로 마치는 제2부 주의 만찬 예배가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드리고 있는 예배방식과 별 차이가 없고, 이 예배전통이 2천년 동안 지켜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4장 36-37절과 5장 1-11절의 말씀은 예배의 두 가지 형태, 즉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 혹은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를 보여준다. 바나바의 경우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아벨의 예배, 건강한 상태로 소개되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는 우리가 멀리해야할 가인의 예배, 병든 상태로 소개되었다.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려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헌금을 내는 사람의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될 수 있는데, 18세기 말의 유명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마음의 끌림(감동) 때문에, 은혜를 받아서, 고마워서 하는 행동보다는 의무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에 나타난 문제점은 끌림 동기 때문도 아니고, 의무동기 때문도 아닌,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 때문이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아니한 헌금을 굳이 무리하게 행한 것은 명예욕과 경쟁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나바는 모든 것을 다 바친 후에 교회의 일군이 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 바쳐버리고 나면 생존에 위협이 따를 것이므로 판매금액의 일부를 숨겼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제 몫을 남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다.
새 성령이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모형은 아간의 사건에 있다. 여호수아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이스라엘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친 아간의 제거를 기록한 것처럼, 사도행전은 성령님을 속임으로써 교회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친 아나니아부부의 제거를 기록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령이해에 대한 중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사상 때문에 성령님의 인성이나 메시아의 신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여호와증인들은 성령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있고, 메시아의 신성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을 자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령님의 속성에 대해서 매우 분명한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첫째, 3절 “성령을 속이고”는 성령님이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사회성과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시며 느끼시고 교제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4절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는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9절 “주의 영”은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시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세 가지 성령님이해는 유대교의 성령이해와 확연히 다른 내용이었다. 유대인들이 성령님을 단순히 하나님의 권능 또는 힘으로만 알았던 것에 비하면, 엄청 달라진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교회를 속인 것은 성령님을 속인 것이며, 성령을 속인 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며 꾸짖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훼방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서 경고하셨다. 히브리서 저자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는지 생각하라”고 히브리서 10장 29절에서 경고하였다. 이들 성구들을 통해서 보건대, 성령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초월적인 신이시다. 누구로부터 만들어진 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이시다. 시작된 때가 없고 만들어진 때가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존 하시는 영이시다. 그러나 다른 영들, 이를테면,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들은 시작된 때가 있고, 만들어진 때가 있는 영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원하지 못하며, 제 위치를 지키지 않았던 마귀의 영들은 멸망 받게 된다.
성령님은 인간처럼 인성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우리와 교제할 수 있다. 성령님은 지적인 활동, 감성적인 활동, 의지적인 활동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랐던 것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령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아신다. 성령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새 이스라엘 공동체
5장 12-16절에 의하면, 새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상적이고 부흥하는 공동체였다. 거기에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깨끗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보듯이, 악한 누룩이 기생할 틈이 없었다. 둘째, 똘똘 뭉쳤다. “다 마음을 같이하여” 집회소인 솔로몬 행각에 모이기를 힘썼다. 셋째, 유무상통했기 때문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4:32-35). 넷째,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다섯째,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돌봄을 받았고 나음을 입었다.
2014년 초에 방영된 KBS 역사드라마 <정도전>은 여러 면에서 새 천년시대를 확장시켜가는 사도행전에 실린 역사드라마와 닮아 있다. 그러나 이상사회를 이루는 방법에 있어서는 분명 달랐다.
첫째, 민중의 눈물을 닦아줄 메시아가 필요했다. 14세기 후반 고려의 권력은 백성을 수탈하는 도구였고, 왕실은 간신들의 독무대였다. 외침으로 백성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했다. 이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기다렸고, 장차올 더 좋은 세상을 희망하였다.
둘째, 난세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다. 예수님 공생애 때는 이미 6백년간 나라를 빼앗긴 채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던 구약시대 말, 신약시대 초였다. 유대인들 중에는 여전히 새 천년시대를 꿈꾸는 자들이 있었다. 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를 살았던 고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에는 이상사회를 실현시켜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정도전 같은 이들이 있었다.
셋째, 백성을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실천으로 인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2:47, 5:13). 당연한 결과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2:47).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得其民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공은 백성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지만, 반대로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더해서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 26:52)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은 또 다른 혁명에게 자리를 내 주게 된다. 개혁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한 정몽주는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혁명가의 칼에 살해되고,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 왕도정치를 표방하던 정도전은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국가를 만들려한 이방원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정권을 손에 쥔 다음 이방원은 죽은 지 13년이 지난 정몽주에게 1405년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면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린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혁명이 완수되고 왕권을 공고히 한 시점에서 또 다른 혁명가나 이상가가 아닌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과 평등의 복음으로 새 세상을 펼치려했던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초대교회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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