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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14]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10(행 5: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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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648 2014.03.2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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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14]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10(행 5:17-42)

부활사건들의 체험

구약성서의 기반은 창조신앙이다. 히브리인들의 창조신앙 그 자체는 하나의 신비요, 뛰어난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히 11:3)고 말하였듯이,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20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신약성서의 기반은 부활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약성서의 기초이다. 특히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란 토대에서 시작되었다. 사도행전을 하나의 건축물로 본다면, 그 기초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다. 이 기초위에서 잇따라 일어난 부활사건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고,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게 된 사건이며, 16절의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이 나음을 입은 사건이고, 19절의 옥문이 열린 사건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반복적으로 맛보고 경험하는 새 이스라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의 자격도 부활을 상징하는 교회의식인 침례를 통해서 주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부활의식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비록 부활에 의한, 부활의, 부활을 위한 삶일지라도, 17-18절에서 보듯이, 사람들의 시기를 받기도 하고, 매순간 뭔가에 묶이고 갇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옳음이 그름에 갇히는 느낌, 양화가 악화에 밀려나듯이, 악한 세력에 밀려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19-20절에서 보듯이, 옥문이 열리는 부활사건체험이다.

부활사건들의 체험은 예수의 이름을 믿음에서 비롯된다. 부활사건들의 체험은 우리의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부활사건들의 체험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자가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긴다. 하나님 이외에 구원자가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이 점을 노래한 시가 구상의 ‘부활송’이다.

죽어 썩은 것 같은 매화의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날의 누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사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일어서 걷고 뛰게 된 사건, 옥문이 열린 사건은 우리가 바라고 믿고 참고 인내하는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주의 사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

17절에서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하게” 된 원인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온통 사도들에게 쏠리면서 기득권 보수에 타격을 입게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병 고침의 능력과 부활신앙이란 측면에서 사도들의 권위는 상승한 반면,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고, 민중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이 점을 암시하는 말씀이 12-14절이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특별 방법의 역사와 일반적이고 자연스런 방법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특별 역사란 통치, 기적, 계시를 말하고, 하나님의 일반 역사란 조절, 섭리, 영감을 말한다. 통치, 기적, 계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으로써, 천지창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성육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하며,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어떤 일의 발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절, 섭리, 영감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으로써, 의사나 약의 도움에 의한 치유, 친구나 모르는 사람을 통한 기도의 응답과 같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아니 하면서도 우리의 삶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성서가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란 세 단어를 함께 쓰고 있고(행 2:22; 고후 12:12; 살후 2:9; 히 2:4; 롬 15:18), 반드시 기적의 목적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큰 권능’(power)은 기적의 근원 즉 하나님의 큰 능력 행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승천사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게 된 사건,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이 나음을 입은 사건, 옥문이 열린 사건이 큰 권능에 해당된다.

‘기사’(wonders)는, 12절에서처럼(miraculous signs and wonders), 표적과 함께 쓰이고 언제나 복수형이다. 기적의 결과 즉 하나님의 큰 능력 행함을 눈으로 본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결과들, 예를 들면, 놀람, 경악, 기이함 등을 말한다.

그리고 표적(signs)은 확증, 입증을 의미한다. 기적이 일어난 목적을 말한다. 기적이 말씀(계시)을 전하는 자와 전해진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 증거, 확증하기 위한 것이란 뜻이다. 12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에서 보듯이 기적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말씀이 선포되게 하며, 선포된 그 말씀을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성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모세의 기적은 이스라엘 국가 형성을 위한 것이었고, 엘리야의 기적은 야훼가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왕상 17:24). 두 번째로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은 그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사도들의 방언과 능력 행함은 새 언약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교회 창립과 신약성서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 운동

공회원 가말리엘의 충고는 사도들을 변호한 듯이 보여도, 실상은 예수 운동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예수란 이름으로 병자가 낫고, 사람들의 인기가 이 이름에 쏠리는 현상에 대한 우려였다. 공회원들이 사도들의 예수 운동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가말리엘이 반란의 주동자들이었던 ‘드다’와 ‘유다’를 언급한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 2세기의 혁명가 발 코크바와 17세기 중반의 샤베타이 제비를 비롯해서 출현한 거짓 메시아가 무려 30명이 넘었다고 믿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드다와 유다는 메시아 운동을 일으키려한 혁명가들이었을 것이다. 가말리엘이 이들 전사들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요하난 벤자카이가 믿었던 것처럼, 로마제국의 군사력 앞에서는 그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고, 혁명가들의 무모한 반란은 결국 유대인들과 유대교의 멸절을 가져올 뿐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말리엘이나 요하난 벤자카이는 군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군사혁명은 민중에게 피를 흘리게 할뿐, 그들이 원하는 빵과 명예와 주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보았다. 요하난 벤자카이는 긴 안목에서 볼 때, 이스라엘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유대교에 있다고 보았고, 혁명군의 감시망을 뚫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허락을 받아 얌니아(Jamnia 혹은 Japheth)란 곳에서 유대교학교를 시작한 것은 선견지명에서 비롯된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벤자카이와 그의 후계자 가말리엘 2세가 살려낸 유대교의 불씨가 조국 땅이 사라진 과거 1878년간 유대인들의 정신적 영적 문화적 종교적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력혁명을 원하는 민중의 요구를 뿌리친 것이나 사도들이 펼친 예수 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예수 운동은 요하난 벤자카이나 가말리엘 2세의 유대교 운동보다 월등히 위대했다. 유대교 운동은 소수 유대민족에게 국한되었던 반면, 예수 운동은 온 인류에로 확대된 범세계적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공로가 가장 컸다.

이스라엘이 약소국이어서 세계를 제패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은 옳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는 선민사상이 있었고, 메시아신앙도 있었다. 여건만 갖춰졌다면, 주변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스, 로마도 이룬 대제국을 이스라엘이라고 이루지 못하란 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 년 전 예수님시대의 로마제국은 너무나 완벽했다. 유대인들이 무너뜨리기엔 너무나 강성했다. 그런데 그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칼의 힘이나 군권이 아니라, 기독교신앙이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가 암시했듯이, 로마제국이 망한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기독교가 해낸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1500년 이상 유럽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41-42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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