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15]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1(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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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15]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1(행 6:1-7)
기독교복음의 가교(架橋)
유대인들은 인류를 두 민족으로 나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민족과 버림을 당한 이방민족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3만이 넘는 신들을 믿었던 그리스-로마사회는 문명사회였던 반면, 선민이었던 유대인들은 그들이 멸시하던 이방나라들의 노예와 떠돌이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유일신 창조주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 그 하나님 야훼를 자기 민족의 신으로 선점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영성만큼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했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 그들이 그토록 희망했던 땅은 빼앗기고 없었지만, 종교에서만큼은 세계를 정복한 민족이었다. 따라서 유일신 종교와 엄격한 율법에 기반을 둔 유대인들의 높은 도덕성과 윤리적인 삶은 온갖 미신과 환락과 잔인함이 지배했던 타민족들에게는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많은 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 후원자들로 채울 수가 있었다. 나중에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기독교로 다시 개종하였다.
유대인들은 두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히브리파유대인들로서 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끌러간 이후부터 근동지역의 공용어였던 아람어로 말하고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배타적 민족주의자 유대인들이었다. 모국에 돌아와 거주했으나 6백여 년째 속주민의 처지를 벗지 못하고 있어서 민족주의와 적대적 배타주의가 강했다. 주후 70년과 135년의 유대-로마전쟁의 참패로 속주의 권한조차 빼앗긴 채 흩어졌다.
또 한 부류는 헬라파유대인들로서, 오순절 날 사건에서 보듯이, 대략 16개국들에 흩어져 사는 해외교포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일부가 성령 강림직후 제자들이 구사한 방언들을 알아들었던 사람들이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인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외국에 얹혀살면서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구사하고, 헬라어성경을 읽었던 외국문화에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헬라인들 중에는 유대교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 경외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헬라파유대인들은 그들에게 할례와 개종침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할례와 개종침례를 받지 아니한 하나님 경외자들을 ‘문의개종자’라 불렀고, 비록 소수였지만, 할례와 개종침례까지 받은 완전개종자를 ‘의의 개종자’라 불렀다. 반면에 히브리파유대인 회당들에는 하나님 경외자들이 많지 않았다. 모국이어서 외국인이 많지 않았던 점도 있지만, 민족주의와 적대적 배타주의가 강해서 외국인에게 전도할 마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에서의 누가의 관심은 헬라파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의개종자들에게 집중되어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복음을 이방세계로 중개할 가교(架橋)였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 예루살렘교회가 지도자로 뽑아 안수한(5절) 일곱인 가운데 여섯 사람, 즉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가 모두 헬라파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안디옥 사람 니골라는 의의개종자였고, 에티오피아 내시, 가버나움의 백부장, 고넬료 백부장, 고린도인 디도 유스도, 빌립보인 자주옷감장사 루디아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의개종자들이었다. 이들 유대교개종자들은 모두 기독교로 재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제자와 그리스도인
6장 1-2절에 “제자”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말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들을 일컬어 부른 자의식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이고, 스승의 삶을 본받아 그 사상을 전파하는 자들이다.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가 대표적인 스승과 제자의 사이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에서 타인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일컬어 부른 외부적 호칭이다. 이사야 62장 2절,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은 외적 수동적 호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으며,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가장 먼저 듣게 된 제자들은 시리아 북부의 대도시 안디옥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서 “일컬음을 받다”로 번역된 동사, ‘크레마티조’는 공공에 비추진 인물이나 어떤 이름이나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쓰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비즈니스에 종사한다면, 그는 비즈니스맨으로 불리고, 의술에 종사한다면, 의사, 송사를 맡아 변호한다면, 변호사, 목회에 종사한다면, 목사로 불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혹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증인’을 뜻한다. 옛 언약백성이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면, 새 언약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전서 4장 16절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마땅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전파하는 ‘여호와의 증인’임을 자처하여 유대교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관심이 헬라파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의개종자들에게 집중되는 것과 또 6장에서 헬라파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파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생긴 갈등이 언급된 것 모두가 히브리파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배타적 율법적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이어서 기독교복음을 이방세계로 중개할만한 가교(架橋)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역할이 외국문화에 포용적이었던 헬라파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로 재개종한 이방인 하나님 경외자들에게 옮겨가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주후 30년 베드로가 세운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수장으로 한 유대교적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유대교적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예수님을 오실 자로 예언된 메시아로 믿는 유대교인들(Messianic Jews)이었다. 이들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기보다는 유대교에 속한 나사렛파(Notzrim)에 가까웠다. 기독교 복음이 그들의 수중에서 벗어나 바나바, 바울, 스데반, 빌립과 헬라파유대인들에 의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도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때문이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예루살렘교회가 일시에 커지고 질서를 유지할만한 제도가 전무한데다가 문화와 언어가 다른 히브리파유대인들과 헬라파유대인들이 뒤섞인 데서 갈등이 드러났다. 이 갈등은 “헬라파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사람을 원망”한데서 비롯되었다. “원망”의 근원은 헬라파유대인들에게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일곱을 택하여” 헬라파유대인들의 지도자로 삼았는데, 이 때 뽑힌 일곱 사람은 모두가 헬라파유대인들이었다. 두 부류의 유대인들 사이에 파생된 갈등이 표면적으로는 구제 때문이었지만, 근원적으로는 언어, 문화, 이념, 사상과 신앙에서 큰 차이를 보인 두 이질적 문화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때 뽑힌 칠 인을 집사로 생각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은 헬라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었지, 집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때 뽑힌 빌립의 전도와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복음은 편협한 배타적 선민의식과 독점적 영토주의 및 율법주의에 찌든 히브리파유대인들의 손과 국경을 벗어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뻗어나갔다. 이들 헬라파유대인들은 세계선교를 최초로 시도한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교의 율법과 성전질서와 민족성별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훌쩍 뛰어넘는 특별한 것임을 히브리파유대인들보다 훨씬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들 헬라파유대인들을 택하여 일하실 수 있는 단초가 바로 이 위기에서 마련되었다. 위기가 기회로 바뀐 순간이었다.
사도들은 모두 히브리파유대인들이었다. 이 갈등은 나중에 ‘율법과 은혜’라는 교리문제로까지 확대되지만 결국 은혜를 강조한 헬라파유대인들의 주장이 율법을 중시하는 사도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정통성의 가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도들의 승인을 받게 된다(15장).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히브리파유대인들은 편협한 배타적 선민의식과 독점적인 영토주의 그리고 율법주의에 젖어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헬레니즘 문명권에 동화되지도 못했고 세계화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헬라문화와 언어 및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해외에서 자랐거나 공부한 경험이 없었으며, 해외에 친지들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계선교에 기여할 능력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준비된 그릇들이었던 헬라파사람들의 포용적이고 열린 복음적 사고와 헬라어 구사능력과 문화수준을 세계선교를 위해 쓰신 것은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었다.
베드로와 바울은 피차에 다른 문화와 다른 성향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일군으로 쓰셨고 통합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의 기초를 놓게 하셨고, 정통성의 가부를 결정짓는 열쇠의 역할, 심지어는 바울이 세운 선교교회들조차 정통성의 가부를 결정짓는 역할까지 베드로에게 맡기셨다. 그렇지만, 교회를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데는 바울을 사용하셨다. 이 두 사람은 그릇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고, 쓰임이 달랐다. 하나님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소중하고 쓸모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위기는 언제나 기회였다. 사도행전은 전화위복의 사례를 모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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