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20]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6(행 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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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20]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6(행 9:1-31)
사울(바울)의 성장
바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바리새인의 아들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시민권자로 출생하였다(23:3,26, 22:28). 다소는 주전 64년 이후 로마의 자유시가 되었다. 다소는 학문의 명소로써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헬라학교 교사들은 주로 소요학파로써 헬라철학을 강의하였다. 소요학파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리케움(Lyceum) 동산을 거닐면서 문화생들을 가르친 데서 연유되었다. 학생들은 긴 행각이나 시장 또는 거리를 거닐면서 공부하였다.
유대인의 교육은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6살 때부터 모세오경, 쓰기, 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살에는 미쉬나를 배웠다. 미쉬나는 바울 당시 구전의 형태였다. 교육 방법은 암기위주였다. “훌륭한 학생은 새지 않는 샘과 같다”고 한 랍비는 말하였다. 15살이 되면, 가마라를 공부하였다. 유대인들은 또 자녀들에게 무역(상업)을 가르쳤다(18:3).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파는 직업훈련을 받았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학교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농부, 목자, 포도밭과 같은 전원생활과 관련된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반면, 바울은 경주, 전투, 군사용어, 건축가, 채무자, 노예, 시 등을 인용하였다(17:28; 고전 15:53; 딛 1:12).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도 공부하였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볼레스(Boles)에 의하면, 유대인의 부모들은 12살이 되면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고 한다. 따라서 바울도 12살에 예루살렘에 유학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점으로 보아 청소년시절 8-10년간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후에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다소에 돌아갔다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때의 나이가 대략 30여세였을 것이다. 이런 추측을 기반으로 연대를 작성해 본다면, 주후 4년경에 출생해서 16년경에 가말리엘 문하생이 되었고, 예수님이 공적활동을 시작했던 26년경에 고향 다소로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교회가 창립되고 3-4년이 지난 34년경에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것이다(22:3; 26:4).
스데반 순교이후 사울(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영장을 지참하고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개종하게 되었다. 이때가 주후 34년경이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2km 정도 떨어진 고대 시리아의 수도였다. 폼페이에 의해서 주전 64년에 점령을 당하였다. 유대인이 약 4만 명, 회당이 약 30-40개 정도 있었다고 전한다. 주후 66년 네로황제 때에는 1만 명의 유대인이 체육장에 갇혀 한 시간 내에 살육을 당하였으며, 만 팔천 명의 그들의 가족들도 살육을 당하였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그를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쓰시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 개종함으로써 사도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님한테서 직접 받은 계시라고 주장하였다(갈 1:12이하).
사울(바울)의 개종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운명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었다. 이후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 즉 자기운명의 결정권이 없는 자로 불렀다. 그러나 그의 개종으로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 수가 더 많아졌다”(31절).
바울은 개종직후 아라비아사막으로 내려가 일정기간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갈 1:17-18).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즉시 복음 전도자로 나섰다. 이를 지켜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하였고, 바울은 다메섹을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의 개종사실을 교회에 알렸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자신이 다메섹을 탈출할 당시에 다메섹이 아레타스4세(Aretas, 9BC-AD40)의 통치권 아래 있었던 것처럼 진술하였다. 다메섹은 주전 64년에 로마에 점령되었지만, 이 지역에서 발굴된 주후 34-62년 사이의 주화들에서 로마황제 네로의 옆얼굴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의 증언에 비춰볼 때, 나바테아(요르단)의 왕 아레타스4세가 로마황제 티벨리우스 사후(AD37) 다메섹을 통치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런 정황이 사실이라면, 스데반의 순교와 바울의 개종 및 개종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주후 34-40년 무렵에 발생한 것이 된다.
예수님이 여우라고 불렀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부인이 아레타스4세의 공주였다. 안디바가 본처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본처는 나바테아로 도주하였고, 이에 격분한 아레타스4세는 예수님의 공생애기간이었던 주후 29년 이후 몇 차례 헤롯 안디바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초기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은 바울의 등장과 기독교 탄압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큰 위기는 역설적이지만, 바울이란 인물도 없고 아무런 탄압이나 박해가 없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기독교는 아마 유대교 안에서 발생한 한 작은 메시아 운동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고,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처럼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있어서, 바울의 탄압으로 인해서, 교회에 몰아닥친 위기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타인 바깥세상으로 흩어지게 되고 예수복음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됨으로써 기독교가 대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온 유럽의 국교가 되었으며, 종국에는 세계인의 종교가 되어 인류에게 인간다움의 회복과 중생의 기쁨을 안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탄압만으로 기독교가 세계 최고의 종교가 된 것은 아니다. 그의 극적인 개종과 이방인 선교를 향한 도전과 모험과 영웅성과 천재성이 있어서 가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제대로 된 인물이, 또 그런 인물의 발탁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행운을 가져다주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크든 작든 자리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릇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명예욕과 권세욕과 물욕 때문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들이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다. 크고 작은 수많은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쇠퇴되고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옳은 인물의 선택, 준비된 그릇의 발탁이야말로 공동체들의 발전과 구성원들의 행복에 있어서 더없이 중요하다.
사울(바울)의 발탁
바울이 개종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사도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지만(26-31절, 갈 1:18-19), 아무도 바울을 만나 주려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였다. 그때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을 도와 사도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이후 바울은 자신의 개종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살해음모를 알고 피신하여 고향 다소로 돌아가 칩거하였다(22:17-21). 10여년 후 바울을 안디옥교회로 불러낸 사람도 바나바였다. 바나바는 바울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알아본 사람이었다. 인재의 발굴과 등용보다 인간집단에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도 마찬가지였다. 주후 374년 30대 후반의 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집정관에게 침례를 베푼 후 일주일 만에 밀라노교회의 주교로 임명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은 탁월함 그 자체였다. 침례를 받고 일주일 만에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된 자의 이름이 암브로시우스인데, 그는 본래 삼위일체파와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 사이의 중재관이었다. 밀라노의 주교가 공석이 되자 삼위일체파와 아리우스파가 각각 주교직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하였는데, 이 두 파가 극적으로 합의하여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주교로 재임한 20여 년간 정치 종교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어거스틴을 발굴하여 히포의 주교가 되게 하였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무릎 꿇게 만든 영웅이었다. 이 황제가 바로 392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로마의 국교로 만든 인물이었다. 바울과 암브로시우스에게서 보듯이, 올바른 인재가 지도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반대로 그릇된 인물이 지도자가 되는 것보다 인간 공동체에 더 큰 재앙은 없다.
하나님이 예정하여 택하시고, 바나바가 눈여겨보고 이끌어 주었던 바울의 영웅성과 천재성은 탁월함 그 자체였다.
바울은 신념의 사나이였다. 신념에 살고 신념에 죽는 강단이 구단이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탄압한 것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신념 때문이었고, 그가 기독교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도 그것이 옳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의 신념을 꺾을 수 있는 인물은 아마 하나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다메섹 인근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야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도전 정신, 모험 정신, 불굴의 투지, 목숨을 건 선교열정, 노예가 주인에게 하듯이 그리스도를 섬긴 봉사정신 등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그가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다름 아닌 자신보다 3백여 년 전에 칼로써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환상을 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복음으로써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영웅정신이 솟아난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은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기독교신학이 전무한 상태에서 13편의 주옥같은 신학과 실천에 관한 서신들을 쓴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밖에는 달리 설명될 수 없는 천재적인 작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가 바울과 같은 영웅적인 인물이 되든지, 아니면, 바나바와 같은 인물이 되어 바울과 같은 인재를 발탁하고 후원하는 일로써 하나님의 일, 살림의 일, 빛의 일, 생명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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