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21]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7(행 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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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21]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7(행 9:32-43)
베드로의 순회사역의 의미
예루살렘교회는 주후 30년 5월 28일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4년쯤 후에 스데반의 순교사건이 터졌고, 헬라파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여기서 사방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1장 8절의 말씀 그대로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를 말한다. 2천 년 전 당시의 세계는 지중해연안의 나라들, 즉 남유럽과 근동과 북아프리카를 말하였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신 땅 끝은 바울의 최종 선교지역이었던 스페인쯤이 된다. 이 드넓은 지역에 누가 선교했는가에 대해서 누가는 사도행전에 충분한 암시를 남겼다.
첫째,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은 ‘예루살렘 시온에로의 오름’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이 ‘오름’을 ‘알리야’(aliyah)라고 부른다. 주후 30년 오순절 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헬라파유대인들은 15개국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이었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시작한 교회들이 있었다. 로마교회가 그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주후 34년경에 발생한 사울의 탄압으로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헬라파유대인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향하면서 복음을 전파했고,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교회들을 시작하였다. 이 중의 하나가 안디옥교회였다.
셋째, 사울의 박해를 피해서 흩어졌던 빌립이 고향으로 향하던 길에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웠고, 유대지방 남서쪽으로 내려가 에티오피아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에티오피아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예루살렘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유대총독부가 주재해 있고, 가족이 있는 가이사랴를 향해 오르면서 여러 성읍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베드로의 유대지방 순회전도는 이 빌립이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 진행된 것이고,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진지 대략 10년, 빌립이 복음을 전파한지 대략 5년이 흐른 때였다. 베드로의 순회사역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첫째, 빌립을 비롯해서 헬라파유대인들이 세운 교회들을 인준 또는 승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사마리아교회를 인준했던 베드로는 연이어 빌립사역의 새로운 열매인 팔레스타인 서부지역(32-43절)의 교회들은 인준하였다.
둘째, 예수님께 직접 듣고 배운 것을 전달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을 확증하는 의미가 있었다.
셋째, 위로부터 물 붓듯 부음 받은 성령의 충만함과 큰 능력 행함을 통해서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든든하게 세우는 의미가 있었다.
베드로의 교회인준에 무슨 형식이나 증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표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도의 정통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그러면 빌립의 사역에는 정통성이 결여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빌립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인물이었고, 사도들로부터 배우고 안수를 받아 임명된 사역자였기 때문에 빌립의 사역은 사도들의 인준이나 승인이 없더라도 사도의 정통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순회사역에는 빌립의 사역을 확증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 점은 바울의 선교지역들을 순회했던 베드로의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서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져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본받고 실천하였다. 그 몇 가지 사례들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님의 임재, 보증, 인침을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것의 모형은 다윗과 사울이 사무엘의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신의 은사를 받아 왕이 된 것에 있다. 예수님의 경우, 안수가 침례로 바뀐 것이다. 이 의식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침례의식과 견진의식이 유래되었다. 3세기 초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을 보면, 침례의식 직후에 견진의식으로 기름을 이마에 발랐으며, 주의 만찬에 참여토록 하였다. 여기서 기름 바름은 성령님의 임재, 보증, 인침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점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님의 임재, 보증, 인침으로 공적생애를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침례를 언제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침례를 받으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한 그의 첫 설교 역시 예수님의 생애에 잇대어져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2:38).
둘째, 예수님은 나사렛회당에서의 첫 설교와 배척당함으로써 그리스도로서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셨다. 베드로도 예루살렘성전에서의 첫 설교와 배척당함으로써 공적 생애를 시작하였다.
셋째, 예수님은 중풍병자들을 고치셨다. 베드로도 룻다에서 8년간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던 애니아를 고쳤다. 애니아는 헬라 이름이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서쪽으로 약 42KM에 위치하고 있었다.
넷째, 예수님은 나인 성읍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 베드로도 욥바 성읍 과부들 중 죽은 도르가를 살렸다. 도르가의 아람어 이름은 다비다였다. 그 뜻은 ‘영양’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쓰신 ‘달리다굼’(Talitha Cumi/막 5:41)과 같은 아람어 ‘다비다굼’(“다비다야 일어나라, Tabitha Cumi)을 사용했다. 욥바 성읍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룻다에서 서해안 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섯째, 예수님은 유대교에 입교한 백부장의 초청을 받으셨다. 베드로도 유대교에 입교한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았다.
여섯째, 죄를 지은 한 여성이 옥합에 향유를 담아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님과 접촉하였다. 이 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셨다. 베드로도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식탁 교제한 사실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처럼 베드로의 공적활동은 다방면에서 예수님의 공적활동에 잇대어져 있다. 이것은 누가의 역사기술방법의 하나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의 일군들의 일치된 믿음과 실천 속에서 이뤄졌고, 이뤄지고 있으며, 이뤄질 일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에 잇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삶조차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의 삶에 잇대어져 있다는 것이 누가의 예리한 통찰이었다.
성도의 삶에 잇대어서
베드로의 ‘다비다굼’(Tabitha Cumi), 이 한 마디 말로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베드로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기보다는 그 은혜를 입을만한 다비다 자신의 그리스인다운 삶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사례들을 살펴보면,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병든 자들 자신이 주님의 자비를 입을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하게 간구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과 귀와 혀와 살을 만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 “안심하라.” “일어나 걸으라.” “네 소원대로 되라.”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셨다. 그렇다면, 다비다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녀의 삶은 성도의 삶에 잇대어져 있었다. 그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비다는 빌립이 주후 34년경이후에 세운 욥바교회의 그리스도의 여제자였다.
둘째, 다비다는 욥바교회의 실제적이고 희생적인 봉사자였으며, 손수 재단하고 바느질한 옷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셋째, 다비다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함으로써 병들어 죽게 되었고, 그녀의 죽음은 도움을 입었던 과부들에게 커다란 슬픔이자 충격이었다.
넷째, 성도들은 베드로가 근처 룻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내 욥바로 와줄 것을 간청하였다.
다섯째, 다비다는 제2의 삶을 얻었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다비다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주님께 헌신한 것은 바느질이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부르시고 히브리민족의 구세주로 이집트에 보내고자하셨을 때, 모세는 자기 자신의 부족한 능력과 히브리인들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회의적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에 모세는 “지팡이입니다.”고 대답하였다(출 4:2). 유목민에게 지팡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떼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지켜내는 무기요, 의지의 수단이었다. 다윗이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노래한 것처럼, 또 무거운 갑옷과 칼을 던져버리고, 물맷돌을 챙겨들고 골리앗에 맞섰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봉사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 다비다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면, 그녀는 필경, “바늘입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느질은 다비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재능이었고, 생존의 수단이며, 의지였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였다. 우리도 다비다의 삶에 잇대어서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고, 필요한 이웃에게 기부하는 성도가 될 때,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전화위복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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