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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23]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9(행 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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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678 2014.05.0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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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23]새 언약 백성의 위기와 기회9(행 11:1-30)

설교시간에 찾아오는 응답

가이사랴에 이방인교회가 들어선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11장은 예루살렘교회가 이 사건을 충격으로 받아드렸다고 전한다. 이방인들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지라도, 유대교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계명과 울타리 법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부정한 사람들이었고,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진지 10여년이 흐른 이때까지도 히브리파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교인들’ 또는 사람들이 ‘나사렛파’(Notzrim)로 부르는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의 이러한 소동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빛과 생명이 되기 위한 불가피한 과도적 현상이었다.

베드로는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이사랴 행적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17절이 그 내용이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 해명을 듣고 비로소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문서는 기도시간과 설교시간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시간임을 강조한다. 기도시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천사가 응답을 갖고 왔으며, 환상이 보였고, 옥문이 열렸다. 설교시간에 고넬료와 그 권속이 위로부터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게 된다(14:8-10). 사도들이 6장 4절에서 “오로지 기도와 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세 종류가 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보이는 말씀인 주의 만찬과 침례가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설교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것이고, 보이는 말씀인 주의 만찬과 침례는 듣고, 보고, 맛보고, 오감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장 42절을 보면, 예배의 4대 요소인 설교, 교제, 떡 뗌, 기도 가운데서 설교가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하면, 그리스도께서 설교하는 것”이고, “설교 중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입을 수 있다. 종교개혁자 칼뱅도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제자 불링거도 1566년의 <제2헬베티아 신앙고백서>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임재하시는 중요한 수단이다. 사람들은 기도시간과 함께 설교시간에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같은 사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한 말씀에서도 입증된다.

위기는 곧 기회

19-21절은 사울의 박해로 흩어진 헬라파유대인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시리아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는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셨던 것이다.

흩어진 헬라파유대인들이 처음에는 동족인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 가운데 바나바와 같은 구브로 섬 출신과 북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의 유대인들이 안디옥에서는 헬라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로인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없는 부정한 백성들로 생각하는 이방나라에 그 부정한 사람들로 이뤄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발전이 배척과 탄압의 위기에서 이뤄졌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을 앞두고 1장 8절에서 제자들에게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박해라는 위기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헬라파유대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누가의 보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수순에 따른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 몇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지방과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따라서, 그 주역이 본토출생의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외국태생의 디아스포라들에로 바뀌어 갔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의 히브리파에서 점차 스데반, 빌립, 바나바, 바울 등의 헬라파유대인들로 주역이 바꿨다.

둘째,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지방과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인 중심에서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 하나님 경외자와 완전 이방인에게로 확대되었다.

셋째,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지방과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따라서, 초기에는 히브리파유대인 통치권자들의 가벼운 박해로 시작하여 점차 사울과 같은 헬라파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가 있었고, 이 박해는 복음이 한 곳에 정체되는 것을 막고 지속적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넷째,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지방과 사마리아지방과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 약간의 갈등과 소동이 있었다. 최초의 갈등은 외국태생의 헬라파유대인 과부들을 소홀히 대접한데서 생겨났다. 이 갈등은 헬라파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로 일곱 사람이 뽑히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또 베드로의 가이사랴 행적의 결과로 유대교에 입교한 자들의 이방인교회가 세워진 것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가벼운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 결과를 낳았다.

다섯째, 사도들의 권위와 승인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미 주후 40년대부터 안디옥교회가 세계선교의 전진기지로 세워지고 있었다. 선민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배타주의보다는 만인구원에 기초한 세계주의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바나바의 인품과 믿음

시리아 안디옥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문이 사도들에게 전해졌다. 이 소문을 듣고 사도들은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복음을 전한 구브로 출신의 헬라파유대인들과 동향인이었다.

바나바는 헬라파지도자 일곱 사람에 들지는 못했지만, 인품과 믿음만큼은 그들보다 뛰어났다. 그 때문에 누가는 바나바를 일곱 사람보다 훨씬 앞서 소개하였다. 게다가 24절은 일곱 사람에게 사용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6:3)과 비슷한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11:24)고 칭송하였다. 차이점은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란 말 대신에 “착한 사람”과 “믿음이 충만한 자”란 표현을 쓴 것이다. 미묘한 차이지만, 일곱 사람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인 반면, 바나바는 지혜와 높은 평판은 없지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세간의 평판보다는 인품이 선하고 믿음이 듬직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파송된 이후로 안디옥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졌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예루살렘교회에 부조금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부흥하였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인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언제 왔는지, 성전봉사에 참여했는지, 처분한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땅을 처분한 돈을 성전이나 회당에 바치지 않고, 교회에 바쳤다는 점이 주목되는 점이다(4:37). 이후 사울의 박해 때 그는 구브로를 거쳐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한 동향인들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알려진 것은 없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4:36)이란 뜻으로 붙여준 별명으로써 본명은 요셉이었다. 바나바에 대한 사도행전의 평가는 칭찬일색이다. 위로의 사람, 착한 사람(11:24), 화목케 하는 사람(11:27), 긍정적인 사람(9:26-27), 행동하는 사람(9:27), 인정받는 사람(4:36, 11:22,25), 협동하는 사람(11:25-26),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11:24), 기도하는 사람(13:1-2), 순종하는 사람(11:22, 13:2-4), 신령한 사람(11:23, 13:2), 헌신하는 사람(4:37),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11:26)이었다는 것이다.

바나바는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바울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대면을 꺼려하는 사도들에게 면담을 적극 주선하였다. 또 바나바는 터키 남단에 위치한 고향 다소에 돌아가 칩거하던 바울을 찾아내 데려와서 안디옥교회를 맡겼으며, 자신은 오히려 그를 조력하고 돕는 자로 자세를 낮췄다. 바나바는 기꺼이 기득권을 버리고 자신보다 뛰어난 바울을 주연으로 내세웠으며, 자신은 조연으로 내려앉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나바는 불세출의 인물, 바울을 키워냈다. 이 두 사람은 합심해서 일 년 동안 안디옥 교회를 섬겼고, 또 함께 선교여행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안디옥에서 비로소 제자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26절). 27-30절은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임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멸시하던 이방인들로부터 부조금을 받아야할 정도까지 상황이 역전되고 판도가 바꿨음을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의 일의 성패까지도 인간의 인품과 믿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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