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41]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6(행 20: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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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1]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6(행 20:13-38)
주일예배의 중요성
유대인들은 땅과 나라를 지키는 방법을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거나 군비를 증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 관점이 성서를 기록한 신앙인들만의 것이었는지, 정치인까지도 그런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성서에서 신앙과 정치 모든 면에서 모범으로 다윗과 솔로몬이 강조된 것을 보면, 군사력을 천대시한 것은 결코 아닌 듯싶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계명은 안식일 준수이다. 제4계명인 안식일을 잘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우상숭배 관련 1-3계명은 물론이고, 다른 계명들도 잘 지켜내는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안식일 계명을 어길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안식일 규례를 만들어 지키게 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생각이 이 정도인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고 해서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강한 집착과 교회의 승인권과 옳음과 그름의 판결권을 가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강력한 영향력이 주후 70년까지 지속된 상황에서 50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포기하고 주일을 지킨 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특별한 무엇이 예수님의 부활승천사건과 오순절 날 성령강림사건이었다.
첫째,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 즉 교회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고, 그 날을 기념할 필요가 있었다. 새 언약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 후 첫날” 곧 “주 첫날”이라고 불렀고, ‘주님의 날’ 또는 줄여서 ‘주일’이라고 불렀다.
둘째, 주후 30년 5월 28일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 오순절 날이었고, 이 날은 일요일이었다. 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가 일요일에 시작되었다.
셋째, 옛 언약 백성의 옛 땅과 옛 나라 곧 문자적 이스라엘의 언약의 내용은 율법이었지만, 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 곧 영적 이스라엘의 언약의 내용은 복음이었다. 율법은 이 복음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후 50년대의 교회들(행 20:7; 고전 16:2)은 주일예배를 드렸다. 90년대의 교회들도 주일예배를 드렸다. 계시록이 “주의 날”(1:10)을 언급했고, <디다케> 및 이그나티오스와 바나바도 그들이 쓴 서신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더 이상 받지 않으신다면서 주일예배를 권장하였다. 2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12년경에 플리니(Pliny the Younger)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터키 북서부 비두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정한 날(주일) 새벽에 모여 연도형식의 찬송을 불렀고 서약(십계명)하였으며, 흩어졌다가 저녁에 다시 모여 “보통의 흠 없는 음식에 참여하였다.” 주후 150년경에 순교자 저스틴은 교회들이 주일날 모여 사도들의 회상록과 저술들을 낭독하였고, 형제들의 회장(당회장)으로부터 설교를 듣고 일어서서 다함께 기도하였으며, 물을 섞은 포도주와 빵을 봉헌한 후 성만찬 기도와 분병례와 헌금과 구제가 있었으며, 집사들은 예배에 참석치 못한 교우들에게 성찬을 배달하여 참여토록 하였다고 <변증서>에 기록하였다.
장로직에 관해서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로 자신이 겸손과 눈물로 시련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한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었고(18-21절), 둘째로 자신이 범사에 모본을 보인 것처럼 양떼의 감독과 목양에 최선을 다 할 것과 위험에 대비하여 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것이었다(28-35). 28절에서 바울은 성령님께서 온 양떼 가운데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다”는 말을 남겼는데, 장로의 기능이 감독과 목양이란 점을 밝힌 것이다. 감독자와 목양자는 목사와 목회자를 지칭하는 말이므로 밀레도에 집결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은 붙박이 목사들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목회자의 호칭은 장로(elder)에서 사제(presbyter)로 다시 목사(pastor)로 바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 신약성서에서 장로들은 회중이 선출한 목양권과 감독권을 갖는 붙박이 목회자들이었다(20:28, 딤전 5:17, 약 5:14). 그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했다(딤전 3:2, 12, 딛 1:6). 선교지에서 그들을 장립한 것은 바울, 바나바, 디도와 같은 떠돌이 전도자들이었다(14:23, 딛 1:5).
둘째, 디모데의 경우에서 보듯이, 떠돌이 전도자들은 장로회로부터 안수를 받았다(딤전 4:14. 행 13:3 참고). 그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장로를 세웠으나, 대체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바울처럼 결혼을 포기한 자들이 있었다(고전 7:8).
셋째,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경우 장로는 부제(집사, 사제서품 1년 전에 서품), 사제(장로, 대학교육7년+병역/봉사3년=10년 후 서품), 주교(감독, 교구장), 대주교(대교구장), 추기경, 교황으로 계급화 되었다. 장로가 사제로 바뀐 것은 가톨릭미사가 제사예배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개신교에서 사제개념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마르틴 루터의 만인사제설(벧전 2:9)과 존 녹스가 평신도 장로제를 도입하여 장로교회를 만든 때부터였다.
다섯째, 개신교에서 장로와 목사의 역할 또는 기능을 놓고 논쟁이 시작된 것은 1840년대 미국의 변방교회들에서였다. 이때 신학과 목회훈련을 받고 회중에 초빙되어 정착한 유급 전담 목회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같은 전통교회들은 신학과 사목훈련을 받은 자들을 사제(장로)로 서품하여 지역교회에 목회자로 파송하기 때문에 개신교에서와 같은 논쟁이 없다.
여섯째, 초빙되어 정착한 유급 전담 목회자가 장로인가 혹은 장로의 감독과 지시를 받아야하는 전도자인가라는 논의가 1890년대에 미국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목회자는 장로들의 부름을 받고 그들의 엄격한 감독아래서 교회를 섬기는 주재(駐在) 전도자라는 주장과 목회자는 교회의 주도적인 장로요, 여러 장로들과 동등하지만 첫째(당회장)라는 주장이 맞섰다. 미국의 경우, 교단에 따라서는 장로를 목사보다 우위에 혹은 목사를 장로보다 우위에 두기도 하며, 그 중간에 두기도 한다. 목회자 호칭은 장로가 우위인 경우 전도자(evangelist), 목사가 우위인 경우 목사(pastor), 그 중간인 경우 목회자(minister), 설교자(preacher), 전도자, 혹은 드물게 목사로 불린다.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서
바울의 삶은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져있다. 예수님께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십자가의 길인 예루살렘에 오르셨듯이, 바울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랐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유월절에 맞춰서 예루살렘에 오르셨고, 바울은 그리스도 나라의 건국일인 오순절에 맞춰서 예루살렘에 올랐다(19:21-21:17). “예수께서 ....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눅 9:51)하신 것처럼, 바울은 22-24절에서 예루살렘에 오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해주셨다는 것, 바울은 그 길을 목숨 걸고 달려갈 길,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쳐야할 길로 여겼다는 것,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을 예언한 아가보 선지자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만류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며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준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만류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다”(마 16:21-24)고 하신 말씀에 잇대어져 있다. 또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21:14)고 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신 기도에 잇대어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성령님의 감동이 그 길을 피해가라는 지시가 아니라 기도하라는 지시오, 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일 곧 복음의 일을 생각하라는 지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령해서 미래에 생길 일을 미리 아는 예지의 능력보다는 미리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또 죽기까지 헌신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과 바울이 오름의 행진을 했던 지상 예루살렘은 하늘 예루살렘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비록 그곳에 오르는 길이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 갇힘과 매 맞음의 길, 죽음의 길일지라도, 예수님이 인류의 속죄양이 되시기 위해서 유월절에 맞춰 외롭게 오르셨듯이, 또 바울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오순절에 맞춰 올랐듯이, 성도는 하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길 끝에 최후승리가 있고, 최후영광이 있으며, 최후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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