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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2]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7(행 2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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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30 2014.06.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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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2]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7(행 21:1-40)

거룩한 입맞춤

20장에서 바울 일행은 4월 중하순에 에게해 북부서안의 드로아를 떠나 남부서안의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지나 밀레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오게 하여 고별설교를 하였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울면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입맞춤 인사는 고대근동과 그리스-로마세계의 문화였다. 구약성서에서는 이삭 때부터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친인척과 친구 사이에(창 27:26-27, 출 18:7, 삼상 20:41), 상봉과 작별 때(창 31:28, 롯 1:9, 왕상 19:20), 존경과 복종의 표시로(삼상 10:1, 시편 2:12) 입맞춤 인사를 하였다. 신약성서에서는 탕자와 그의 부친이 상봉 때 입맞춤 인사를 하였다(눅 15:20).

입맞춤 인사를 예배의식에 도입한 것이 주의 만찬 때 성도들이 나눈 거룩한 입맞춤이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6절, 고린도전서 16장 20절, 고린도후서 13장 11절, 로마서 16장 16절에 나온다. 이들 서신들은 모두 50년대의 저술들이다. 베드로도 전서 5장 14절에서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하였다.

이 거룩한 입맞춤이 뺨과 뺨을 맞대는 인사였는지,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뽀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원과 일치를 상징했다는 점이 중요할 것 같다. 이 거룩한 입맞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육체를 상징하는 성소휘장을 갈라놓음으로써 민족의 담, 성별의 담, 신분의 담, 계급의 담을 허물고, 민족성별, 신분계급의 차별 없이 누구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히 4:16) 또 누구나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도록”(히 10:19)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히 10:20)에 근거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거룩한 입맞춤은 민족의 담을 헐어버렸다. 정하고 거룩하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한 이방인과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둘째, 거룩한 입맞춤은 성별의 담을 헐어버렸다. 성애적인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는 입맞춤을 거룩한 것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의식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피와 거룩한 입맞춤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교회를 오해한 부분이 있었고, 그것이 박해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형제자매들이 나눈 거룩한 입맞춤은 이방인들이 바쿠스축제에서 나눈 성애적인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셋째, 거룩한 입맞춤은 신분의 담을 헐어버렸다. 주인과 노예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을 맞췄고, 양반과 상놈이 형제자매로서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노예가 주인의 형제님과 자매님이 되고, 상놈이 양반의 형제님과 자매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거룩한 입맞춤은 계급의 담을 헐어버렸다. 황제도 신하도 백성도 노예도 모두가 하나님의 동등한 사랑받는 자녀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노예 오네시모에 대해서 주인인 빌레몬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몬 1:16).

예루살렘에로의 오름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고스, 로도를 거쳐 터키 남부서안의 바다라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베니게(레바논)행 배로 갈아타고 두로(Tyre)에 도착하였다(1-3절). 두로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떠나는 날 두로의 그리스도인들과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작별한 후 배를 타고 돌레마이(Ptolemais)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돌레마이’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주전 285-246년), 가이사랴는 로마황제를 기념하여 각각 붙여진 도시명이다.

바울 일행은 항해의 종착지인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다”(8절). 개역성서는 빌립을 집사로 번역하였지만, 원본과 상관없는 추측성 번역이다. 사도 빌립과 구분하기 위해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으로 불렸다.

‘전도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전도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립에게 있어서 ‘전도자’는 교회의 직분(엡 4:11)을 말한 것이다. 빌립, 디모데(딤후 4:5), 디도(딛 1:5-9), 바나바(행 4:35-37), 아볼로, 마가, 실라, 가이오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전도자는 한국에서의 전도사보다 상위개념이다. 초대교회 당시 전도자는 사도, 선지자, 교사와 같은 떠돌이 전도자를 말하였다.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을 주업으로 하는 떠돌이 전도자들은 지역교회에서 감독과 목양을 주업으로 하는 붙박이 목회자인 장로들과 역할과 기능면에서 구별되었다. 오늘날에도 장로를 목사보다 상위에 두는 교회들은 목회자를 전도자(evangelist)라 부르며, 목사를 장로보다 상위에 두는 교회들은 목회자를 목사(pastor)라고 부른다. 그 중간에 있는 교회들은 목회자(minister), 설교자(preacher), 전도자, 드물지만 목사라고 부른다.

빌립의 네 딸들은 처녀 예언자들이었다. 가이사랴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유대에서 내려와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형제들이 그 말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지만, 바울은 듣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예루살렘에서는 구브로 사람 나손의 집에 머물렀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인을 말한다. 사도와 교사와 더불어 선지자는 떠돌이 전도자였다. 장로를 지역교회의 붙박이 목회자라고 한다면, 사도, 선지자, 교사는 떠돌이 전도자였다. 주후 90년경에 <디다케>는 이들 떠돌이 전도자들이 방문을 하면 영접을 하되, 하루 이상 머물지 말게 할 것이며, 3일을 머물면 거짓 선지자로 보라고 하였다. 또 이들이 떠날 때에 다음 장소까지 이동하는데 필요한 음식이외에 돈을 요구하면 거짓 선지자로 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자기가 가르친 것을 행치 않는 자도 거짓 선지자로 보라고 하였다. 떠돌이 전도자들은 1세기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2세기부터는 교회들이 장로(사제와 주교)들의 사목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장로와 주교(감독)는 본래 동일한 직분이었으나 2세기 초부터는 주교(감독)가 개신교의 담임 목사개념이 되었다.

사도들의 고난의 행진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야고보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선교보고를 하였고, 이방인교회들이 보낸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바울 일행이 사도들을 만났다는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이즈음 사도들은 떠돌이 전도자로서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떠나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들은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1세에게 참수당하고, 베드로가 투옥되었던 주후 44년에 박해를 피해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떠났을 가능성이 크다. 베드로가 탈옥 직후 예루살렘을 떠났고(12:17), 67년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한 마태도 45년경에 예수님의 어록을 적은 <로기아>를 남기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러나 사도들은 주후 51년경에 안디옥교회에서 야기된 율법과 복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의 모임을 개최하였다(15장).

전설에 의하면, 사도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제비뽑기로 지역을 나눠 흩어졌다고 한다. 이때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이주하였고, 노년에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가 95년에 석방되어 계시록을 남기고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빌립은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에서, 도마는 인도에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이집트에서,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고, 그도 역시 복음서를 남겼다. 안드레와 열심당원 시몬은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못 박혔다.

20-21절은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진지 28년이 지난 주후 58년경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없이 많았으나 여전히 “율법에 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울이 반 모세, 반 율법, 반 유대주의자란 악평을 듣고 있었다고 전한다. 교회가 설립된 지 28년이 흘렀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유대교인으로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여론을 반등시켜볼 생각으로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실인 서원을 끝내고 정결예식을 치러야할 네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 함께 정결예식을 행하고 모두의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바울 자신도 서원을 끝내고 머리를 깎아 보관하였지만, 아직 정결예식을 치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결예식을 치러야했다. 26절은 “그래서 바울은 그 다음날 그 네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예식을 한 뒤에,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결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하였다.”고 전한다.

일주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오순절 명절을 지키려고 “아시아에서 온 헬라파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군중을 충동해서,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나가 때려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본적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방인인 그를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온 것으로 오해하였다(27-29절).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해졌다. 성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천부장이 군인들과 함께 달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은 예수님을 죽인 로마군인들 때문에 난폭한 유대인들의 손에서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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