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44]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9(행 2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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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4]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9(행 22:22-30)
로마제국의 시민권
유대-로마전쟁 때를 빼고는 유대지방에 로마군단이 주둔한 사례는 없었다. 유대총독부가 주재한 가이사랴에 “이달리아대”가 주둔하였는데, 병력은 2개 대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개 대대는 가이사랴에 남고, 다른 1개 대대는 예루살렘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대(Cohort)병력은 600-800명이었고, 천부장이 맡았다. 천부장은 선출된 시민 중에서 맡았기 때문에 병사출신인 백부장과 달리 직업군인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으로 끌고 가서 채찍질하여 소란의 원인을 알아보라고 명령하였고 백부장은 부하를 시켜 바울을 기둥에 묶게 하였다. 로마인의 채찍은 쇠붙이나 뼛조각이 매달려있었기 때문에 채찍질을 당하면 죽거나 폐인이 될 정도로 무서웠다. 타키투스(Tacitus)는 10명중 7명은 죽고 나머지 세 명은 들것에 실려 나간 후 평생 절름발이가 된다고 기록하였다.
25절에서 바울은 백부장에게 “로마시민을 유죄판결도 내리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라고 항의하였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태장을 묵묵히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기 직전에서야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혀 상관들을 불안에 떨게 만든 적이 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로마시민권자의 권리를 쓰지 않았던 것은 복음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다. 태장을 받고 감옥에 갇힘으로써 바울과 실라는 실제로 교회설립의 기회를 얻었다. 위기를 통해서 기회를 얻는 전략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전략이 통했던 것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2세의 비폭력시민저항운동이었다. 시민들이 처참하게 매를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짐으로써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았고, 미국의 흑인들은 인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달랐다. 교회는 28년 전에 세워졌고, 믿는 자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굳이 부당한 채찍질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채찍질을 당하기 전에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다.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인 것을 안 천부장은 빌립보의 상관들처럼 불안에 떨었다(29절).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였다. 바울의 조부가 폼페이 장군휘하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시민권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8절에서 보듯이, 시민권은 돈으로도 살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인 메사리나의 총애를 받던 자들이 시민권을 팔았다. 23장 26절에서 보듯이,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였다.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는 로마식이고 루시아는 헬라식인데, 이것은 루시아가 헬라인으로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로마시민권을 취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마제국의 전체인구 6천만 명 가운데, 시민권자의 수는 15퍼센트를 차지한 노예숫자 9백만 명보다 더 적었다. 그만큼 희소가치가 높고 특권도 많았다. 권위의 상징은 긴 토가를 걸칠 수 있었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었으며, 상업에 제약이 없었다. 시민권자와 결혼할 수 있었고, 고문과 구금을 함부로 당하지 않았으며, 재판의 권리가 있었다. 또 노역과 세금을 면제받았고, 오락행사의 무료관람과 무료배급도 받곤 하였다. 이 특권이 유지되던 때에 로마는 강한 군대를 유지하였다. 로마시민권을 빌미로 속주민들 중에서 양질의 젊은이들을 모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주후 212년 카라칼라 황제가 발표한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ana)을 로마제국의 붕괴의 원인으로 보았다. 이 칙령은 로마시민과 속주민과의 차별을 없애고,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동등하게 로마시민권을 준다는 공포였다. 이 칙령은 로마건국 일천주년을 35년 남겨둔 상태에서 나온 엄청난 변화였다.
이 칙령으로 인해서 로마시민권은 더 이상 특권이 아니었다. 이 칙령의 공포로 인해서 노예를 제외한 제국내의 모든 자유인이 동등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마치 유대인들만을 선민으로 여기던 옛 시대의 특권을 새천년을 바라보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릴 것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민의 특권을 준다는 사도 바울의 복음과도 맥을 같이 한다.
당시 주변국들의 시민권취득개념은 각기 달랐다. 먼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고 하면, 남자의 경우 할례를 받아야 하고, 남녀 모두 개종침례를 받아야 하며, 613개의 계명과 울타리 법들을 지킬 것을 서약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는 조건은 종족이나 언어나 혈통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오직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기독교복음이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양가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이 아니면, 비록 그들이 그리스 태생이고, 아테네를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하였을지라도, 아테네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케도니아 출생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17세 이후 플라톤의 제자로 20년간 아테네에 머물면서 학문분야에 공을 세웠으나 시민권을 얻지 못하였다. 아테네인이 생각하는 시민권개념이 혈통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는 건국(753BC) 초기부터 전쟁에 이겨도 스파르타처럼 패자를 농노로 삼아 호되게 부려먹지 않았다. 오히려 유력자들에게는 로마시민권을 주고, 심지어 원로원 의석까지 주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다 이들 패자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로마인들이 생각한 시민권개념은 혈통이 아니라, 뜻이나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분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취득할 수 있는 것이 로마시민권이었다. 그러던 것이 카라칼라 황제 때에 와서는 시민권이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평범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로마시민권을 갖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고, 로마시민권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노력이 있어야했다. 그러던 것이 주후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누구나 로마제국의 시민이면, 로마인이든, 속주민이든 상관없이 시민권을 갖게 되니까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게 돼서 좋긴 했는데, 시민권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 로마제국의 쇠퇴를 불러오게 되었다.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의 복음전파로 기독교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양반이나 상놈의 구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천국의 시민권을 갖게 된 것은 좋은 일인데, 자칫 값싼 은혜로 전락하여 복음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결과를 가져와 기독교의 쇠퇴를 불러오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인구는 세계 곳곳에서 줄고 있다.
새 언약 백성의 시민권
성서는 ‘땅’과 ‘나라’이야기이다. 따라서 시민권은 땅과 나라에 관련된 또 다른 주제이다. 속주민에게 있어서 제국의 시민권은 신분보장은 물론이고 신분상승의 기회까지 제공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자긍심이 대단하였다. 비록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의 나라는 사라진지 오래며, 그들은 수백 년째 속주민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열방의 족속들을, 심지어 자신들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점령국들조차도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의 간택을 받지 못한 이방 민족들로 간주할 만큼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하고든 싸워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야곱의 후손이었다. 그들의 조국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를 붙잡고 씨름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천사를 놓아준, 그러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얻은 이름이다. 결국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시민권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자부심을 갖게 만들고,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는 희망을 노래하게 만드는, 그래서 해마다 해방의 떡을 먹고 자유의 포도주를 마시게 만드는 동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시민권은 영적으로 하늘 가나안땅에서 누리는 참 안식의 표요(히 4장), 이 땅에서의 삶을 종국적이고 영원한 삶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여 더 궁극적이고 영원한 가치, ‘장차올 더 좋은 것’을 위해서 헌신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바로 이 시민권의 약속과 보장을 말한다. 따라서 바울은 ‘장차올 좋은 일’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였다(엡 1:21). 고린도후서 5장 5절을 보면,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성령님은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한 ‘약속’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설명되었다. 광야사막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확실하게 인도한 것과 동일한 개념이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히6:9), ‘좋은 소망’(히7:19), ‘더 좋은 언약’(히7:22), ‘더 좋은 약속’(히8:6), ‘장차 나타날 좋은 것’(히10:1)이라고 말하였다. 유대인들도 ‘더 좋은 것을 사모’하였지만, 그것은 지상의 것이었지, 영원한 하늘의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하나님은 미리 세우신 ‘더 좋은 계획’에 따라(히11:40)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자들을 위한 ‘한 도시’ 곧 하늘 가나안땅에 새 예루살렘을 마련해 놓으셨다(히11:16). 이것이 새 언약 백성의 시민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고 하였고, 히브리서 저자는 “더 나은 본향”, 곧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자고 하였다(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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