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45]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10(행 2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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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45]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10(행 23:1-35)
공회에서의 진술
천부장은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하는지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이튿날 공회(Sanhedrin)를 소집하고 바울을 그들 앞에 세워 진술토록 하였다. 바울이 공회원들을 주목하여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자마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진술을 가로막고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2절).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재임기간(AD47-58)에 제사장들에게 줘야할 십일조를 주지 않고 모운 재산을 로마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친 사악한 인물이었다. 주후 66년에 유대-로마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열심당원들은 그의 집을 불태웠고, 헤롯궁전의 도수관 속에 숨어 있던 그와 그의 형제를 찾아내 죽었다.
진술 첫마디부터 막히자, 바울은 자신을 차분히 변호할 수 있는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교리적 불일치를 이용하여 위기상황을 벗어났다. 공회원들은 대부분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토라는 물론이고, 성경의 나머지 글들과 구전과 울타리 법에까지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헬레니즘시대의 영향으로 예정과 자유의지, 영혼불멸, 몸의 부활, 영혼, 천사, 마귀의 존재, 사후상벌, 성서영감, 죽은 자의 미래, 인간의 평등을 믿었고, 원리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치중하여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모든 정파와 종파들은 소멸되었지만, 요하난 벤자카이와 그의 후계자 가말리엘 2세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바리새파는 살아남아 오늘날의 유대교로 발전되었다. 그들이 살려낸 유대교의 불씨가 조국 땅이 사라진 과거 1878년간 유대인들의 정신적 영적 문화적 종교적 구심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를 비롯해서 구성원 대부분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다. 집권세력이었고, 헬라주의자들이었다. 토라(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여 문자적으로 읽었다. 따라서 오경에 실린 레위인의 정결의식과 제사의식,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반면, 오경에 없는 내세, 부활, 영적세계, 천사와 마귀 등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또 이들은 예수님을 처형한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교회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자들이었다. 특히 예루살렘교회 창립 초기에 사도들이 이들의 탄압을 받았다. 이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공회원들은 종교인이자 동시에 정치인들이었다. 그리고 공회는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유일한 통치기구였고,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 법정이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공회(산헤드린)는 해산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바울은 6절에서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공회원들끼리 “큰 분쟁이 생겼고” 바울은 군인들의 보호아래 군영으로 돌아갔다(10절). 밤중에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11절). 절체절명의 위기가 큰 기회로 바뀔 것이라는 위로였다.
단검단원들의 살해모의
날이 새자 바울을 암살하려고 40여명의 유대인 자객들이 모의에 가담하였다(12-15절). 바울이 갇힌 로마 군영(안토니아 요새)에서 산헤드린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매복하기 좋은 곳이어서 암살이 자주 발생하였다. 유대인 자객들은 ‘시카’(sica)라 불리는 단검을 소지하고 있어서 로마인들은 이들 단검단원들을 ‘시카리이’(Sicarii)라고 불렀고, 신약성서는 열심당원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로마에 대항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테러를 일삼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열심당원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와 같은 시몬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 단검단원들(dagger men)의 테러행위는 주전 40년에 로마의 유대인 지배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주후 50년경에 게릴라 전법에 의한 격렬한 저항이 시작되어 결국 66년에는 유대-로마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단검단원들이 바울을 죽이려했던 때는 주후 50년과 66년의 중간인 주후 58년 초여름이었다. 바울이 체포되었을 당시에 천부장은 바울이 혹시 단검단원의 우두머리가 아닌가하고 의심을 했었다(21:38). 이제는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을 철저히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16절에 바울의 조카가 등장한다. 바울이 이때 50대 초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30세쯤 된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바리새인이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단검단원들의 살해모의를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그 정도 연령의 바리새파 청년이라면, 그에게도 이 모의에 참여하라는 권유가 있었거나 모의에 참여한 친구가 있어서 그 같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그는 비밀리에 영문으로 들어가 바울을 면회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면회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천부장은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Felix)에게 편지를 썼다. 로마당국은 유대인들의 자극을 피하기 위해서 지배자 로마를 상징하는 군사를 예루살렘에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가이사랴에 주둔시켰기 때문에 가이사랴의 헤롯 궁에 로마총독부와 로마군 기지가 있었다. 로마군 병사가 예루살렘으로 출동을 해야 할 경우에도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군기는 가이사랴의 기지에 놓아두고 출동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빌라도가 유대총독직에서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법을 어기고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기 때문이었다. 로마가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을 의식해서 취한 일련의 행동들이었다.
총독 벨릭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의 집에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와 함께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된 해방노예였다. 팔라스가 클라우디우스와 절친했었다고 한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벨릭스가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근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세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한 여인은 안토니아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고, 또 한 여인은 헤롯 아그립바 I세의 딸 드루실라(Drusilla)였다. 드루실라는 15세 때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했다가 그를 버리고 16세 때 벨릭스와 결혼하였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0여세였다.
바울의 가이사랴 호송
바울은 총독 벨릭스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가이사랴에 보내졌다. 천부장은 단검단원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두 명의 백부장을 불러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무사히 호송할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바울을 태우고 갈 짐승을 준비시켰다. 또 단검단원들이 테러를 일으키기 전에 신속히 바울과 군사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야하기 때문에 당일 밤 9시에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천부장이 준비시킨 병력은 예루살렘에 남게 될 병력보다 더 많았다. 이는 만일 예루살렘의 로마병영이 단검단원들의 습격을 받는다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천부장은 총독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이 26-30절이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삼가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죽임을 당할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로마시민인 것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해 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소하는지를 알아보려고, 나는 그들의 공회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그가 유대사람의 율법문제로 고소를 당했을 뿐이며,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서, 나는 당장에 그를 총독님께로 보내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도, 그에 대한 일을 각하 앞에 제소하라고 지시하여 두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군인들은 지시대로 바울을 데리고 밤중에 안디바드리(Antipatris)로 향하였다. 안디바드리는 주전 9년에 헤롯 대왕이 재건하여 자기 아버지 안티파트로스 2세의 이름을 붙인 성읍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5km, 가이사랴의 남쪽 45km 지점에 위치하여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오가는 군사들이나 여행객들이 묵어갈 수 있는 사론평원의 성읍이었다.
안디바드리에서 보병과 창병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기병들이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호송하였다. 기병들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천부장의 편지를 총독에게 전달하고, 바울도 총독 앞에 데려다가 세웠다. 총독은 편지를 읽고 나서, 바울에게 어느 지방 출신인가를 물어 보았다. 총독은,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인 것을 알고 “그대를 고소하는 사람들이 도착하면, 그대의 말을 들어보겠네.”라고 말한 뒤에 그를 헤롯 궁에 가두고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 사건에서 세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의 관리들이 바울한테서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다”(29절)는 것이다. 총독 갈리오가 바울을 무죄 방면하였듯이,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바울한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총독 벨릭스, 총독 베스도 및 왕 헤롯 아그립바 2세도 바울을 정죄하지 못하였다.
둘째, 절체절명의 위기가 변하여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4년간의 미결수생활은 일중독에 빠져있던 바울에게 충분한 재충전의 시간을 주게 되고, 계획했던 로마 방문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셋째, 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위기에 직면해서도 물러서지 않고, 영웅적으로 도전하고 진군하여 점진적으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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