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23]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4(눅 10: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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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23]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4(눅 10:25-42)
유대인의 영생개념
누가복음 10장 25-42절은 하늘 예루살렘에로 오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새겨야할 두 가지 덕목에 관한 것이다. 이 덕목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마리아와 마르다의 에피소드는 이 두 가지 덕목에 관한 교훈이다. 이를 위해서 누가는 연관성이 없는 두 가지 자료를 교차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율법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들을 암송하였고, 예수님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에 관해서 각각 말씀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 사랑에 관한 교훈이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에피소드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교훈이다.
25절 후반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이 나온다. 그에게 영생이란 어떤 개념이었는가, 당대의 유대인들은 사후세계를 믿었는가? 세 가지로 답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대인들의 영생은 땅의 개념이다. “얻겠습니까?”에 해당되는 헬라어 ‘클레로노메소’(kleronomeso)는 ’상속받다‘ 또는 ’기업을 얻다‘란 뜻이다. 신약성경에서의 영생 개념도 “땅을 기업으로”(마 5:5) 받는 것이다. 성경은 땅에 관한 책이다. 구약성경은 지상 가나안땅에 관한 책이고, 신약성경은 하늘 가나안땅에 관한 책이다. 이 땅에 관한 용어가 ’상속‘의 뜻을 갖는 ’기업‘이란 말이다. 신구약성경에서 무척 많이 쓰인 단어이다. 떠돌이와 노예였던 유대인들은 땅에 대한 희망(Ha-Tikvah)에서 시작된 민족이고, 땅을 얻었다가 빼앗겼기 때문에 땅에 대한 희망을 수백 년 또는 수천 년간 품고 살았던 민족이다. 그래서 랍비들도 토라(모세오경)에는 사후세계에 관한 언급이 없고, 하나님의 계명들은 지상 땅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며, 이것이 유대교가 사후세계를 믿는 기독교와 다른 점이라고 말한다.
둘째, 구약성경은 페르시아시대까지의 이야기이다. 구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늦게 기록된 에스라(주전 444년경), 역대기상하(주전 450-430년) 및 느헤미야(주전 420년경)의 무대가 페르시아시대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유배된 후 페르시아로부터 성령(스펜타 마이뉴)과 악령(앙그라 마이뉴), 천국과 지옥, 구세주(사오슈얀트), 영혼, 부활, 최후심판 및 영생을 믿었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구약성경에는 이런 개념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성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던 사두개인들은 내세, 부활, 영적세계, 천사와 마귀 등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반면에 구전전승의 권위까지 인정했던 바리새인들은 영혼불멸, 몸의 부활, 영혼, 천사, 마귀, 사후상벌, 사후세계를 믿었는데, 그들에게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은 39권의 구약성경시대가 끝난 뒤인 그리스가 지배했던 헬레니즘시대였다.
셋째, 영생이나 영적개념은 헬레니즘시대에 소개되었다. 헬레니즘시대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주전 331년부터 500여 년간 그리스 언어, 문화, 예술, 문학이 지중해연안세계를 지배했던 시대를 말한다. 로마제국이 헬라제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그리스문화의 영향력은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로마가 누렸던 전성기의 마지막 황제이자,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의 배경인물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Stoa) 철학자로서 주후 180년 전쟁터에서 병사하였는데, 그리스어로 글을 쓴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상록>은 지금도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오름의 행진과 이웃 사랑
25절에서 “예수를 시험하여”란 말은 공적 권위를 가진 율법사가 공적 권위를 갖지 못한 떠돌이 예수님이 뭘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지를 시험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것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사람들 앞에 뽐내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사의 무지를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가는 이 사건을 소개함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2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종합한 것이다. 신명기 6장 5절의 하나님 사랑은 십계명 제1-4계명의 핵심이고,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은 십계명 5-10계명의 핵심이다. 예수님 당시 율법사들은 이 말씀을 소가족에 기록하여 지니고 다녔다.
29절에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는 예수님의 말씀에 민망해진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을 기록한 배경에는 이웃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들추어내려는데 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이란 동료 유대인들을 뜻하며, 죄인, 세리, 창기, 사마리아인, 이방인은 제외된다. 유대인들의 이웃개념은 동료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정(淨)한 사람과 거룩한 사람에 국한된다. 부정한 사람들과의 교제는 율법으로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세리, 창기, 사마리아인, 이방인을 죄가 있는 부정한 자들로 여겼다. 그들과의 교제를 멀리하는 것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길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언급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10:30)까지는 약 30킬로미터이며 내리막길이다. 예루살렘은 석회암으로 된 해발 760미터 고지에 있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60미터나 낮은 곳에 있어서 고도가 무려 1020미터에 이른다. 이 고도와 거리는 한라산 1100고지 휴게소에서 제주공항까지를 도보로 걷는 것과 같다.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덮치는 일이 잦았던 곳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국적은 밝혀져 있지 않다. 유대인일수도 있고 이방인일수도 있다.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살았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고, 두 번째는 강도만난 자의 불행을 본인이나 조상들의 죗값으로 본 때문이며, 세 번째는 성전봉사를 수행할 자로서 부정한 것을 만져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레 21:1, 민 19:11)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제사장 가문인 코헨은 가족의 장례식조차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는 말씀이 있다. 이웃 사랑이 십계명 5-10계명의 핵심이기 때문에 강도만난 자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것은 성결법보다도 더 상위의 법을 어긴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직면했던 문제는 생명살림법과 성결법의 충돌이었는데, 그들은 하위법인 성결법을 지키려고 상위법인 생명 살림법 즉 이웃 사랑법을 어겼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를 국적에 상관없이 자기의 이웃으로 알고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을 올바른 윤리실천자로 보셨다.
오름의 행진과 하나님 사랑
누가는 예수님의 일행이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의 이야기 초반에 배치하였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교 동쪽에 있었던 마을로써 감람산에서 걸으면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다고 한다. 누가가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에피소드를 이곳에 배치한 목적은 하나님 사랑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촉발시킨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였고, 한 가지 답변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이었다. 여기서 누가는 이 계명을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좋은지를 사례를 들어 교훈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12제자 파송설교와 70인 파송설교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에로 오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 6:33) 것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깨우치려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다른 것이면서 동시에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장점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려하는데 있었고, 문제점은 그것들의 본질보다는 의식, 의미보다는 형식, 정신보다는 문자에 치우친데 있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의 행동은 알맹이가 없는 겉껍데기 허례의식에 불과했고 형식에 치우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울타리법들에 노예가 되어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억압하고 죽이는 일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그들은 율법에 매여 정의(義)와 자비(仁)와 신실함(信)을 버린 자들(마 23:23),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는 자들(마 23:25), 소경된 자들(마 23:26), 회칠한 무덤(마 23:27), 외식하는 자들(막 7:6),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막 7:7),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막 7:8-9),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막 7:13),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막 8:18)이었다. 그들의 문제점은 신본(神本)인 척하지만 실상은 인본(人本)에 치우친데 있다. 진정한 신본은 인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본을 이유로 인본을 말살한데 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속박한데 있다. 강도만난 자를 돕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율법의 참 정신이 사랑이란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한 혼혈족이었고, 부정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더 윤리적이었는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베풀었던 사마리아인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인가, 윤리적으로 옳게 사는 것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인가? 이웃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길이요, 기적을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길이다. 기적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를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을 통해 흐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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