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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26]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3(눅 11: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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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755 2013.02.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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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26]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3(눅 11:14-54)

성령님의 참 능력

누가복음의 테마는 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이 오름을 훼방하는 세력과의 영적싸움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길 영적 무장으로 기도와 성령 충만이다. 11장 1-13절에서 예수님은 한 곳에서 기도하셨고, 이를 본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으며, 간청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며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마태는 누가처럼 “성령”으로 적지 않고, “좋은 것”으로 적었다. 마태가 전한 예수님의 말씀, “좋은 것”은 하늘 가나안땅을 말한 것인데, 누가가 “좋은 것”으로 적지 않고, “성령”으로 적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가나안땅을 상속받으려면 성령님의 보증과 인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교훈 직후 14절부터는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 생긴 갈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 배치는 의도된 것으로써 1-13절에서 주기도문, 간청의 기도, 성령이 언급된 것은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훼방하는 배척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성도들이 끈질긴 기도와 성령님의 도움으로 배척을 물리치고 좋은 것인 하늘 가나안땅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가장 심하게 부딪쳤던 마태복음 12장과 23장의 논쟁기사를 누가복음 11장 14-54절에 배치시켰다. 누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확실한 동질성은 끈질긴 기도와 성령 충만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것들로 무장할 때, 세상과의 갈등에서 이기고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좋은 것, 즉 하늘 가나안땅을 얻을 수 있다.

누가복음 11장 14절에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은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태복음 12장 22절에서 이 사람은 눈까지 멀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또 이 불쌍한 사람은 이방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준 자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깨끗함을 받아 하늘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상속받게 될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것을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싫어하여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 불렀는데, 깨끗지 못한 이방인들의 우두머리로 예수님을 매도했다고 볼 수 있다.

성령님의 능력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기독교 복음에도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능력이며, 그들을 하늘 가나안땅을 상속받을 자로 삼는데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늘 가나안땅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민족기업인 지상 가나안땅을 이방인들과 공유해야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과 함께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하였다. 이 시험은 “그대가 진정 오실 자 메시아라면, 빼앗긴 가나안땅을 되찾고 유린당한 다윗왕국을 회복시킬 메시아라면, 이방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민족기업을 그들에게 상속시키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진정 오실 자 메시아인지를, 모세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증명하라.”는 비방이다. 배척자들의 이런 식의 비방과 박해를 극복하는 길이 끈질긴 기도와 성령 충만이란 것이 누가의 지론이다.

예수님의 참 능력

예수님을 시험했거나 비방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입원을 빼앗긴 축귀자(逐鬼者)란 설도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는 민중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라고 전함으로써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지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누가의 선교지가 유대지역이 아니라 이방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바울과 함께 여러 선교지역에서 인종을 불문하고 보통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선교지에서 박해자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바리새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또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자주 충돌했지만,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그 같은 사건들을 일일이 다 기록하는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증진시키는데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삶과 역사적 정황의 극히 일부분을 문자대로 적지 않고, 자신이 섬긴 헬라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정황 또는 기록목적에 따라 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시험한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아니한 것이라든지, “좋은 것”을 “성령”으로 바꿔 소개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비슷한 사건과 비슷한 말씀이 여러 지역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점도 마태와 누가의 차이점에 대한 귀중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가가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가장 심하게 충돌했을 때 하신 말씀들을 11장에 배치한 이유는 하늘 가나안땅에 오르는 길이 험하고 유혹과 탄압이 상주했기 때문이다. 누가가 마태복음에 없는 27-28절, 예수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이곳에 배치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해서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18절)고 하시면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20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는 메시아가 도래했으니 그들이 희망하는 “좋은 것,”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고 한, 다가올 세상, ‘올람 하바’(Olam Ha-Ba)가 임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다가올 세상은 문자적인 성취, 빼앗긴 가나안땅을 되찾고 다윗왕권을 회복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수용한 방식,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능력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기독교 복음에도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능력이며, 그들을 하늘 가나안땅을 상속받을 자로 삼는데 있다. 예수님의 선교활동의 목적이 유대민족만이 아니라, 열방민족의 구원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상태가 이전에는 더러운 귀신을 몰아낸 깨끗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쫓겨났던 귀신이 저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까지 데려와 도합 여덟 귀신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24-26절) 불쌍한 자와 같다고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던 당대의 유대인들의 영적인 형편을 반영시킨 말씀이다.

사람을 살리는 참 능력

예수님은 11장 29절에서 이 세대가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미 언급하신 여덟 귀신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 모세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먹게 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자들은 유대인들이다. 여덟 귀신에 사로잡혀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 불쌍한 자들도 유대인들이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마음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자들도 유대인들이다(39절).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중상모략과 권모술수와 탐욕탐심이 가득한 자들도 그들이다. 그러므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살지 말고, 선한 것으로 속을 꽉 채워 알찬 것으로 남을 도와야 안팎이 깨끗해질 것이라고(41절)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11장 29-36절에서, 삼 일간 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 돌아온 요나의 표적이라면 몰라도, 이 세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회개와 자기 성찰이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란 취지로 말씀하셨다. 또 이 세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받고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찾아온 남방 여왕과 같은 사람들이며,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 세상을 밝히듯이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요나보다 크시고,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이요, 죄로 죽었다가 다시 산자들이다. 사람을 살리는 참 능력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말하는 믿음에 있다.

누가복음 11장 42-52절에 밝혀진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마태복음 23장에 밝혀진 것들과 대동소이하다. 유대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하찮은 양념재료까지 십일조 항목에 넣어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켰지만, 정작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던” 사람들이다. 또 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했으며, 입구를 멋지게 장식한 동굴무덤처럼 겉은 깨끗해 보였지만, 그 속은 악취로 가득하였다. 또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그 속을 보지 못하나 역시 시체가 썩고 있듯이, 또 겉은 멀쩡해보여도 속에는 여덟 귀신이 자리 잡고 있듯이,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유대교 랍비들은 613개의 계명들이 부주의로 깨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수많은 울타리 법들(Gezeiroth)을 만들어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정작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이는 그들이 울타리 법들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어려움을 배려하지 않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어려운 이들에게 가중한 짐을 지웠다는 뜻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을 탄압하고 죽이는 자들이었다. 율법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아선 자들이다.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서도 회개는커녕 자신들을 모욕한다고 거세게 달려들어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렸다고 적고 있다. 지난 2천 년간 유대인들이 겪었던 불행은 기독교신앙을 배척한데서 기인됐다는 것이 토인비 같은 역사가들의 시각이다. 인간을 살리는 참 능력은 예수님을 믿는 소박한 믿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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