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37]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7(눅 18:1-43)
본문
[눅강37]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7(눅 18:1-43)
오만에 눈이 멀어서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재판장, 오만에 빠진 바리새인, 미몽(迷夢)을 헤매는 제자들, 부유한 관리는 모두 앞을 못 보는 맹인들이다. 그들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여리고의 맹인처럼 믿음을 가져야 한다.
누가복음 18장 2-8절의 불의한 재판장과 원한을 가진 과부이야기는 8절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에서 보듯이 믿음을 강조한 말씀이다. 42절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에서 보듯이 믿음은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불의한 재판장의 단점은 2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데 있고, 원한을 가진 과부의 장점은 1절의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요구한데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대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요구하면 악한 자라도 항복하고 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믿음을 갖고 밤낮으로 부르짖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으며, 속히 마음의 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7-8절의 교훈이다. 불신은 시력을 잃게 하지만, 믿음은 시력을 되찾아준다. 믿음은 문제해결의 열쇠를 찾게 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의 한을 풀지 못한 가련한 과부가 믿음이 없는 재판장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듯이, 믿음이 없어 고통당하는 세태를 한탄하셨다.
9-14절의 오만에 빠진 바리새인과 가슴을 치며 지은 죄를 회개하는 세리이야기도 믿음의 시력에 관한 교훈이다. 믿음의 크기만큼 문제의 심각성이 보이고, 해결의 실마리도 풀린다.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눈뜬 소경 즉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데 있었다(막 8:18).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제[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마 7:3)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9절의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가 되고, 털어도 먼지하나 나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완전한 의인인 것처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성전 뜰 중앙에 서서 자기 의를 하나님에게 큰소리로 늘어놓았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오만은 응보를 부른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자기 자신의 현주소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는 율법과 규례(장로의 유전)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명과 율법과 규례들의 본질이 사랑이란 것을 몰랐다. 본질보다는 외식에 눈이 멀어서 자기 부족과 자기 죄를 깨닫지 못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공허한 것이다. 회개가 없는 기도는 허공만 친다. 회개가 없는 행위는 교만만 키운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진실을 보는 시력이다.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하나님께 더 높임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가 훌륭한데 있지 않고 자기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은데 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성전 뜰 한 구석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라고 속으로 응얼거렸다.
부와 명예와 권세에 눈이 멀어서
15-34절은 부와 명예와 권세에 눈이 멀어서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의 소중한 가치를 보지 못한 제자들과 재산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보지 못한 부유한 관리에 관한 교훈이다. 31-33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겪게 될 고난에 대해서,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예고했을 때, 34절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한” 이유가 그들이 부와 명예와 권세에 눈이 멀어서 보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맑은 하나님의 인류사랑에 대한 깨끗하고 순전한 가치를 제자들이나 부유한 관리가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부와 명예와 권세에 어두워지고 더럽혀져 순수하고 맑지 못했기 때문이다. 34절에서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이해하기 어려웠거나 고의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부와 명예와 권세에 눈이 멀어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뜬다면, 부와 명예와 권세를 모두 팔아서라도 그 가치를 손에 넣고자 할 것이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영안이 열려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가치를 본 후부터 180도 달라진 삶을 살았다. 맹인이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랐다”는 43절의 결론말씀처럼 그들의 시력이 밝아졌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고, 그 열매가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31-33절의 말씀처럼, 하늘 예루살렘에 오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험한 가시밭길이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야할 제자의 길이다. 예수님께서 16-17절에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맑고 순수한 믿음만이 우리의 어두워진 눈을 밝아지게 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관리가 하나님의 계명과 모든 율례를 충실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때문이었다. 그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말씀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 그는 분명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지상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받고자한 계명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의무사항을 지켰을 뿐이지, 하늘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받을만한 믿음의 행위는 못되었다. 22절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부족했던 것을 지적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23절에서 그 관리가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던” 것은 유대인의 상식에서 그가 소유한 재산은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킨 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축복이란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복의 개념과 기독교의 복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영원하고 참된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 부와 명예와 권세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이다.
믿음으로 눈을 떠서
35-43절에서 믿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다. 41절에서 믿음은 자비를 입게 한다. 42절에서 믿음은 구원을 얻게 한다. 43절에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며, 이를 지켜본 사람이 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로 오름을 시작한 10장부터 오름이 끝나는 19장까지의 기사들은 대부분 누가복음에만 있다. 그리고 이 여행은 요단강 동편지역, 지금의 요르단에 속하는 베레아 지방에서의 사건들이다. 이 지방은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에 속하지 아니한 이방인 지역이다. 주후 30년 겨울에 갈릴리를 출발한 예수님은 유월절이 다가오는 초봄에 요단강 하류 여리고 근처에 다다랐다. 그리고 35-43절은 여리고 근처 길에서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맹인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하였다. 사람들의 방해와 배척이 있었지만, 그는 더욱 크게 호소하였다. 가련한 과부의 반복적인 한의 소리가 불의한 재판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그의 반복적인 애절한 외침은 예수님의 관심의 끄는데 성공하였고, 그의 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믿음은 예수님의 자비를 입기에 충분하였다.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 것처럼, 자신의 가련한 처지를 잘 안 애끓는 맹인의 호소는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41절에서 예수님은 물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대답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3절에서 맹인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도 모두 다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맹인이 눈을 뜬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 눈을 뜬 후에 만물을 밝히 보듯(막 8:25)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믿음은 자신을 구원했을 뿐 아니라, 그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예수님은 종종 바리새인들을 우매한 소경이라고 질타하셨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디 이뤄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두 영적으로 맹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낡은 가치관과 낡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세계관에로 눈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어둔 현실에서 밝은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죽음이 생명이 되는 것을 뜻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동굴에 갇힌 죄수가 족쇄를 풀고 밝은 광명의 세계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믿음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것을 말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눈뜬 한 사람만의 축복이 아니라, 그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된다. 눈먼 한 사람이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고, 눈뜬 한 사람이 전체를 살릴 수도 있다. 눈먼 사람들이 눈뜬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눈뜬 사람들이 눈먼 한 사람 때문에 눈이 멀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눈을 떠서 실체를 밝히 보고 살림의 일을 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자.
- 이전글 [눅강38]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8(눅 19:1-10) 13.03.12
- 다음글 [눅강36]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6(눅 17:20-37) 13.03.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