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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41]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3(눅 20: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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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445 2013.03.16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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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41]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3(눅 20:19-47)

인두세 올무

19-26절은 정치적 논쟁으로써 인두세에 관한 이슈였다.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의 관심과 일은 온통 손에 쥔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보수하는 데 있었다.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면, 그들이 로마정부에 뇌물을 바쳐서 지켜온 권력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직책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아니한 떠돌이 예언자를 한 마음으로 체포하여 빌라도의 법정에 세우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말로 올무를 놓아 책잡으려고 교활한 자들을 뽑아 보냈다. 보냄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은 것처럼 속이면서 예수님의 입에 올무를 놓았다. 그 첫 번째가 로마황제에게 세(貰)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혹은 옳지 않은지를 말씀해 달라는 간계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간단히 응수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의 “답변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였다”(26절)고 했다.

예루살렘은 그 의미가 ‘평화의 도시’요 다윗이 세운 도시였다. 또 국부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 제물로 바치려했던 모리아 산 정상에 세워진 유일한 성전이 있는 곳이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모습은 화려하고 장엄해보였지만, 그 속에는 권모술수가 판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가 자행되는 곳이었다. 그 중심에서 예수님이 괴롭힘을 당하고 계셨다. 가해자들은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복을 빼입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고위직과 상석을 탐하고 벼룩의 간을 빼먹는 주제에 거창하게 기도하는 자들이었다(46-47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했다. 수확한 곡식의 10분의 1, 술과 과일의 5분의 1, 수입의 1퍼센트를 내야했고, 12세(혹은 14세)부터 65세까지 1데나리온씩 인두세로 바쳐야했다. 인두세는 로마가 평화를 보장해 주는 대가였다. 이밖에도 반 세겔의 성전세와 회당에 자발적으로 내는 십일조도 있었다. 누가복음이 기록되고 있을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내던 성전세를 로마의 주피터 신전에 내고 있었다. 주후 70년 유대-로마전쟁에서 패한 대가였다.

열심당원(zealot)이나 단검단원(sicarii) 같은 과격한 유대인들이 볼 때,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행위는 굴종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수치였다. 만일 예수님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했다면, 매국노로 몰려 민중의 몰매를 당할 일이고,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다면, 반역자로 고소당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세금에 관한 질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지 아니한 기득권자들이 토끼몰이 하듯이 예수님을 죽음의 언덕 골고다에로 몰아가는 정치적 도구요 정치마당놀이였다. 그런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본 예수님은 명쾌한 대답으로 질문자들의 악한 의도를 부끄럽게 만드셨다. 그런데도 나중에 그들은 빌라도법정에서 예수님이 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모함하였다(눅 23:2).

성도들은 성(聖)과 속(俗), 즉 하나님의 나라(교회)와 세상의 나라 모두에 속한 시민들이다. 이 두 나라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별되며, 일치될 수 없지만, 각각이 성도들의 영적 육적 삶에 필요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각각의 영역 속에서 감당해야할 의무들에 충실해야한다. 국가와 교회의 의무 모두에 충실해야 한다.

수혼법 올무

27-40절은 신학적 논쟁으로써 이생과 내생에 관한 이슈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신앙의 모순성을 지적하기 위해 신명기 25장 5-6절에 나타난 수혼(嫂婚, Levirate marriage)법을 들고 나왔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어서 가문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써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관습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맏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물려받고 족보에 올라 그의 상속자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 당시 집권 여당세력으로써 진보 헬라주의를 표방한 유물론자들이었다. 구전전승의 구속력과 권위를 부정하여 토라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고, 그것들을 바리새인들보다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레위인의 정결의식과 제사의식,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반면, 모세오경에 없다는 이유로 내세, 부활, 천사, 마귀 등의 영적 세계를 믿지 않았다. 이 당시 대제사장들, 성전치안 맡은 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사두개인들이었고,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영향력 있는 정치집단이었던 공회원(Sanhedrin)들의 상당수가 사두개인들이었다. 이들이 나중에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한 사도들을 싫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보수 유대주의자들로서 주전 2세기경 하시딤에서 유래하였다. 하시딤(Hasidim)은 ‘경건한 자들’이란 뜻으로써 시리아지역을 통치했던 안디옥쿠스 4세(Antiochus Epiphanes, 175-164 BC)가 펼친 유대교에 적대적인 헬라화정책에 대항한 그룹이었다. 당시 안디옥쿠스 4세는 유대교 말살정책을 펼쳐 성경을 금하고, 성전에 제우스신상을 세우는 등 유대인들에게 혹심한 박해를 가했다. 바리새인들은 토라이외도 각종 구전전승을 정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구전전통의 구속력을 인정하였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주장하였고, 영혼불멸, 몸의 부활, 영혼의 존재, 천사와 마귀의 존재, 사후상벌, 성경의 영감설, 죽은 자의 미래, 인간의 평등을 믿었으며, 주로 원리적인 가르침에 치중하여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셨다. 그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고 타당하지 못한 이유는 이생의 유한한 삶을 영원한 내세의 삶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34-36절에서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고 말씀함으로써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을 부정하셨다. 부활의 몸의 가장 큰 특징은 육신의 몸에 가장 필요했던 본능이 없다는 점이다. 본능은 영적 삶을 사는 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던 것이다. 바울이 말한 육신의 연약함은 이 본능을 두고 한 말이다.

예수님은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살아서 현존하신 분이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그들의 영혼이 잠자거나 죽거나 하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활을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37절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한 말씀이 38절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는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메시아의 신성

유대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신 예수님은 41-44절에서 그들이 문제 삼는 메시아의 신성문제를 들고 나오셨다. 예수님은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고 한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일컬은 사실을 환기시켰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음”(롬 1:3-4)과 다윗과 만민의 주님이 되심을 알리고자 하셨다. 예수님께서 44절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主)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역공을 펼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쉽사리 메시아로 믿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메시아관(觀)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죄를 사하는 구세주도 아니고, 죄가 없으신 삼위일체의 신(神)도 아니었다. 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신성(神性)도 아니었다. 메시아는 빼앗긴 가나안땅을 되찾아줄 제2모세 또는 제2다윗과 같은 정치군사적 영웅으로서 따름과 실천의 대상이었지, 예배와 섬김과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나안땅은 유대인들의 오랜 희망이요, 한 맺힌 희망(Ha-Tikvah)이었다. 그들이 땅을 소유했던 때보다 빼앗겼던 때의 기간이 3배나 더 길었다. 민족사의 대부분이 떠돌이와 노예의 세월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땅은 안식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45-47절은 유대인들의 외식을 비판하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욱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외식”이란 말이 마태복음에서 가장 많은 14회가 쓰였지만, 누가복음에서도 5회나 쓰였다.

21절에서 시험하는 자들이 아첨하는 말로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예수님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다.” 반면에 율법학자들은 613개의 계명들과 수많은 울타리 법들을 사랑하고 또 눈물겹도록 철저히 지키지만,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정의와 사랑과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었고(마 23:23), 누가복음 18장 9절을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또 10장 25-37절을 보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자기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말씀하시고, 율법에 묶여 강도당하여 거의 죽게 된 자를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매정한 인간이 되지 말고, 너희가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처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권면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가르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모르고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자적 의미에 묶여서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들은 유대인들의 올무를 피하고 잠시 그들의 입에 빗장을 걸게 할 수는 있었지만, 음모까지 꺾지는 못하였다. 예수님이 그들의 음모에 의해서 골고다언덕에까지 내몰리는 것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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