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2]구원사역의 점진적 연속성2(행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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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2]구원사역의 점진적 연속성2(행 1:1-6)
이스라엘에 잇대어
사도행전 1장 1-2절은 예수님의 생애를 적은 누가복음에 관한 언급이다. 1절의 ‘데오빌로’(Theophilus)는 ‘하나님의 친구’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평범한 이름이지만, 누가가 그에게 ‘각하’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데오빌로는 높은 직위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출판비용을 부담한 후원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을 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권의 책이 하나님의 공동체들의 출범과 발전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제2모세이신 예수님은 제1모세에 잇대어 사셨다. 그러나 제1모세가 모형과 그림자 또 예시와 예표였다면, 제2모세는 제1모세의 실체와 완성이셨다. 제1모세의 중재로 구약공동체인 문자적 이스라엘이 출범하였고, 제2모세이신 예수님의 중재로 신약공동체인 영적 이스라엘이 출범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공동체들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많다.
두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의 공동체이지만, 구약공동체는 장차 올 더 좋은 신약공동체의 그림자, 모형, 예시, 예표였고, 신약공동체는 구약공동체의 완성과 실체이다.
두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의 회중이지만, 구약공동체는 문자적인 이스라엘이고, 신약공동체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같은 하나님의 회중이지만, 구약공동체는 모세의 율법(토라)을 언약의 내용으로 한, 소수 유대민족만을 위한 유대교를 신봉하고, 신약공동체는 예수님의 복음을 언약의 내용으로 한, 열방민족을 위한 기독교를 신봉한다.
두 공동체가 모두 가나안땅을 약속의 땅으로 확신하지만, 구약공동체는 문자적인 팔레스타인 땅을 고집스럽게 희망하고, 신약공동체는 영적인 하늘 가나안땅을 소망한다.
두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불안하고 불행한 지상에 속하느냐, 안전하고 행복한 하늘에 속하느냐, 그래서 문자적이냐, 영적이냐의 차이가 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적인 이스라엘에 잇대어 있다. 바꿔 말해서, 기독교가 유대교에 잇대어 있지만, 유대교의 완성이란 점이 다르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도 모세가 전한 율법에 잇대어 있지만,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문자적인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조차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온전하고 완전한 하늘과 땅이 나타날 때까지는 광야에 세워진 잠정적인 나라요, 순례중인 나그네의 천막생활이다. 더욱이 교회는 세상 속에 있고, 그리스도인들도 연약한 육체 속에 머물기 때문에 온 우주와 모든 육체가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불완전한 상태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 후에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회중을 인도했듯이, 죄악의 권세로부터 탈출한 그리스도인들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 그 성령님의 임재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이 승천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이 사도행전 1장 3-5절이다.
신명기의 고별설교에 잇대어
사도행전 1장 3-5절의 말씀은 모세가 임종직전에, 가나안땅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스라엘 회중에게 남긴 고별설교에 잇대어 있다. 임종직전에 남긴 설교와 축복이 모세와 예수님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의 지도자나 족장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유훈을 기록에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복음서 저자들은 모세가 신명기서에 남긴 고별설교에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잇대었다. 대표적인 저자가 요한이다. 그는 복음서 후반부에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실었다. 모세와 예수님이 모두 임종직전에 설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시대를 눈앞에 둔 계약 공동체들이었다. 이 두 공동체들은 막하 지도자들을 떠나 보내야할 위기상황에 놓여있고, 임박한 투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보상의 말이 담긴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였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족장들은 인접한 국가들에 대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또 언약들을 어떻게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할지에 대한 교훈과 경고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의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신명기만큼 길지 않다. 그리고 이 짧은 고별설교는 3절에서 보듯이, 부활하시고 40일간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신 후, 승천을 앞둔 상황에서 이뤄졌다. 모세가 사망 후 부활한 사실이 없지만, 유대인들은 그의 몽소승천을 믿었다. 죽은 후 시신을 찾지 못했음으로 승천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간은 히브리민족의 광야 40년 생활을, 승천하시고 열흘 후인 오순절 날에 이뤄진 성령님의 임재는 모두 출애굽사건에 잇대어진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사건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모두 이들 공동체들에게 새천년시대를 여는 중대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장 4-5절의 말씀,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히브리민족이 출애굽 직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여 율법(토라)을 받고,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기 시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오순절 날 성령님의 임재를 받고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새천년시대를 활짝 개방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를 바라만 보시고 들어가지 않았으며, 이 새로운 천년시대를 개방할 자들로 제자(사도)들을 임명하셨다. 모세도 마찬가지로 가나안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신명기서에 남긴 세 차례의 설교들에서 여호수아를 포함한 족장들에게 가나안땅에 들어가 이스라엘을 위해 새천년시대를 활짝 열 것을 명령하였다. 하나님이 앞서 행하셔서 가나안땅의 족속들을 능히 물리치게 도우실 것이므로 두려워말고 떨지도 말라고 당부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과 그것을 차지한 후에는 하나님을 배신하지 말고, 오히려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언약을 준수하라고 당부하였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모세의 이 당부를 잘 지켜내지 못했고, 하나님은 새로운 영적 공동체인 기독교를 세우셔야 했다.
예언자들의 회복운동에 잇대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4절에서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여기에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약속’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약속’은 바벨론 포로기 전후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회복운동의 내용을 말한다. 이것들에는 세 가지가 있다. ‘메시아의 출현’, ‘성령으로서의 세례’, ‘이스라엘의 회복’(사 44:3; 겔 36:25-27; 요엘 2:28-29)이 그것들이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으로, 6절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라고 여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세 가지는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메시아예언의 성취로 선포한 글이고, 사도행전은 남은 두 가지, 즉 ‘성령님으로서의 세례’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한 글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었다. 모든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아(해방자)와 빼앗긴 가나안땅의 주권회복을 고대하였으나,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성령님의 임재사건을 체험한 이후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님의 임재로 특징 지워진 마지막 시대가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고(시작된 종말),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의 희망은 주의 재림의 때로 연기되었으며(미래 종말), 그 조차도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5절에 언급된 ‘성령으로 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 요 14:26-27; 15:26; 행 1:4)는 성령님의 선물인 은사와 구별된 것으로써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말한다. 이것, 즉 성령님으로서의 세례는 내적이고, 개인적이며, 우주적이고,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성령님의 은사는 증거적이고, 공적이며, 제한적이고, 봉사(복음 전파를 위한 도구)를 위한 것이다. 오순절 날 사도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님으로서의 세례’와 ‘성령님의 은사’를 모두 체험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시대를 성령님의 시대로 만드는 것은 인격체이신 성령님이시지,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다. 성령님은 구원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신약시대만의 특징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약속’ 속에 포함된다. 성령님의 은사는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미 주어졌던 봉사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신약시대를 만드는 특징이 되지 못한다.
신약시대를 이끄시는 성령님은 특정한 하나님의 종들에게 능력으로 덧입히시는 사역도 하시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가나안땅의 소유권자임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임과 하나님의 가족의 식구임을 보증하고 인치는 중생사역을 주요 업무로 하신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 속에서 종말에 주어질 천국의 평화를 미리 맛보고 누리게 하면서 점진적으로 성화를 이뤄가도록 도우시는 보혜사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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