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행강3]구원사역의 점진적 연속성3(행 1:7-1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0,660 2014.01.01 12:27

본문

[행강3]구원사역의 점진적 연속성3(행 1:7-11)

성령님에 잇대어

문자적 가나안땅시대를 개방할 여호수아를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 31:23). 영적 가나안땅시대를 개방할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하나님은 단수로 여호수아에게 “너와 함께”라고 말씀하신 반면, 예수님은 복수로 제자들에게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성령님을 통해서 이뤄졌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계시와 능력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회중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성령님께서 임재하신 내주 동거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회중 전체가 민족 신앙으로 대를 이어 연대되었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가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국한되었다. 따라서 개개인에게 내주 동거할 필요가 없었다. 모세, 여호수아, 사사, 왕, 예언자와 같은 소수의 지도자들이 계시와 영감과 능력을 덧입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시대의 구원개념은 영혼구원이나 천국에서의 영생과 같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이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가나안땅에서의 복이고 육체적이고 문자적인 복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시대에 성령님의 역사는 ‘On-dwelling’의 역사였다. 여기서 ‘On-dwelling’이란 겉으로 덧입음(도구화)을 말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이방인들로써 이교인들과 이교문화 속에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에게 임재 하셔서 내주 동거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 성령님의 역사를 ‘In-dwelling’ 혹은 임마누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In-dwelling’이란 내주 동거를 말한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성령님의 사역과 신약시대의 성령님의 사역의 차이점이다.

이 맥락에서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말씀에서 “성령이 임하시면”은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성령님의 In-dwelling를 말한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임재를 선물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너희가 권능을 받고”는 성령님의 선물로써 각종 은사로써의 성령님의 On-dwelling를 말한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는 개개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구원사역, 즉 중생과 성화를 위한 성령님의 내적사역이고, 주의 일군들에게 능력과 은사들을 덧입히심은 구원사역 또는 복음사역을 하도록 도구화시키기 위한 외적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님의 내적 임재와 함께 외적 능력까지 덧입히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증인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그들에게 따르게 함으로써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고, 교회를 창립하며, 신약성서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들에게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따른 것은 그들 개인의 내적 영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공적으로 외적으로 이뤄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나안땅 정복에 잇대어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히브리민족의 가나안땅 정복에 잇대어져 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12절의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히브리인들이 광야시대를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주인이 없는 땅에 조용히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쟁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가나안땅에 사는 부족들은 히브리인들에게 메뚜기 콤플렉스를 갖게 할 만큼 막강하였다. 가나안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의 족장들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열 명의 족장들은 그들의 건장함에 비해서 자신들이 메뚜기 같다고 하였다.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지 않았고 현실의 높은 벽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었고, 가나안 족속들을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다.

동일한 상황이 그리스도인들한테서도 펼쳐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세계정복이었고, 문자적 전쟁이 아닌 영적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100퍼센트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300년 동안 열 차례 정도 대 환란이라고 일컫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그 엄청난 시련을 극복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주후 392년에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로마제국을 통째로 바꿔서 그리스도의 교회시대를 열었다.

이 새롭고 놀라운 새천년시대의 출범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어떻게 불법종교로써 탄압을 받던 작은 신앙공동체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가톨릭’(우주적, 보편적) 교회라는 호칭을 문서에 등장시키고, 이 호칭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이 있었다.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기에 죽었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히포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동로마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그들이다. 이 시기에 교부시대가 끝나고 중세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탄압을 받던 박해시대가 끝나고 국교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에 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로마제국이 망하고 하나님의 도성(神國, De Civitate Dei)이 열린 종말론적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렇다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나안시대를 연 히브리인들이 배도로 인해서 주권을 상실한 것처럼, 기독교의 중세시대 또한 배도로 인해서 암흑시대가 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로마제국의 멸망, 영광의 탈출로 가나안시대를 연 이스라엘왕국의 붕괴, 극심한 박해를 이기고 연 중세시대의 배도에서 보듯이,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안주하는 순간부터 그 개인과 공동체는 고목처럼 속이 썩게 된다. 히브리인들의 광야시대는 가나안땅이란 종말(희망)을 바라보는 시대였다. 동시에 광야시대는 하나님의 세키나(구름기둥)가 인도하던 이동성막교회시대였다. 가나안땅 정복을 향한 종말론적 희망과 나그네의 이동을 멈춘 개인과 공동체, 세키나의 인도를 상실한 개인과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속이 썩게 되어있다.

에녹, 모세, 엘리야에 잇대어

9-11절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재림이란 두 번째 임재를 말하는 것으로써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임재가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한 임재를 뜻한다. 그러나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7절에서 보듯이, 우리의 알바가 아니다. 과거의 사건들에서 볼 때, 재림의 때와 시기를 언급한 자들치고 이단자가 아닌 경우가 없었다. 그러므로 신천지집단을 경계해야한다. 인간이 어떻게 재림주가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자들이 어떻게 144천명뿐이겠으며, 그들이 또한 대한민국 사람뿐이겠는가?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에녹, 모세, 엘리야사건에 잇대어져 있다. 반면에 재림은 예수님한테서만 일어날 사건이다. 구약성서에도 승천사건이 있지만, 재림에 관한 말씀은 없다. 제2모세의 출현도 모세의 재림과는 관련이 없다. 모세는 제2모세에 대해서 “나와 같은 선지자”(신 18:15)란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제2엘리야의 출현도 엘리야의 재림과는 관련이 없다. 예수님은 말라기 4장 5절의 제2엘리야가 세례 요한이었다고 말씀하셨다(마 11:14). 더구나 예수님께는 모세와 엘리야에게는 없는 신성이 있었다. 하늘로부터의 재림은 예수님처럼 신성을 가진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혹은 “위로부터” 재림하실 것이란 믿음은 유대사상에 잇대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계시적 사건이 다 “위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 이들 용어들이 도합 50여회 정도 나온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천국운동을 펼치신 것은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이후 40년간 광야를 순례했던 것에 잇대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침례(홍해를 건넌) 후 영혼승천 때까지 순례자(제자)의 삶을 살아야한다.

승천을 희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에녹, 모세, 엘리야의 삶과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져 있다. 성경에서 승천하신 분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했던 분들이었다. 에녹은 이스라엘민족의 직접 조상은 아니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영웅들이다. 히브리민족을 애급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여 가나안땅에로 인도한 모세는 죽은 후 시신이 승천하였다는 몽소승천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 민족을 바알숭배에서 건져낸 엘리야는 불 수레와 불 말들 사이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에녹처럼 산 채로 승천하였다(왕하 2:11). 반면에 예수님은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승천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승천 후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모든 사람이 죽지만, 예수님처럼 살아서 하늘 가나안땅에 들어가 왕 노릇할 것을 교훈한다. 하늘 가나안땅을 향하는 자들은 광야를 순례하는 자들이다. 순례자들은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예수님처럼 모든 순례를 마치고 숨을 거두려는 순간뿐이다(요 19: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