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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7]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3(행 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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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30 2014.01.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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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7]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3(행 2:14-36)

사도행전: 여호수아서에 잇대어

누가는 안디옥 출신의 의사로서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때부터 동행했던 선교사였다. 누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이 터키의 고대도시 에베소에서 발견되었다. 그가 기록한 책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다. 이 두 권은 같은 제목의 책 1,2권이다. 학자들은 이 두 권을 일컬어 곧잘 ‘누가문서’라고 부른다.

누가복음은 출애굽기에 잇대어져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제2출애굽기 또는 새 출애굽기라고 볼 수 있다. 제1모세의 실체 또는 새 모세 혹은 참 모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한 유월절 날의 희생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의 삶은 히브리민족의 구원자 모세의 삶에 잇대어져 있다.

사도행전도 출애굽기에 잇대어져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기라고 볼 수 있다. 히브리민족의 영광의 탈출과 가나안땅에로의 오름을 위한 광야순례에서 보듯이, 새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하늘 가나안땅에로의 오름을 위한 광야순례가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또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나라의 출범과 확장이란 측면에서 여호수아서에 잇대어져 있다. 여호수아서가 칼로써 가나안땅을 정복한 역사서라면, 사도행전은 복음으로써 세상을 정복한 역사서이다. 여호수아서가 히브리민족의 나라를 세우려고 지상 가나안땅을 확장시켜나간 역사서라면, 사도행전은 온 인류를 위한 나라를 세우려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확장시켜나간 역사서이다. 이런 점 때문에 사도행전은 여호수아서에 잇대어져 있다.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호수아서가, 모세가 세운 초석위에, 여호수아를 포함한 부족장들이 이스라엘의 집을 지어간 이야기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세운 초석위에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간 이야기이다.

둘째, 여호수아서가 모세의 명령을 받은 그의 후계자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야기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그의 후계자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으로 정복한 이야기이다.

셋째, 여호수아서가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 이를 가로막는 가나안땅의 원주민들과 펼친 전쟁이야기라면, 사도행전은 복음의 확장을 가로막는 이교문화와 정치세력들과 영적으로 펼친 전쟁이야기이다.

넷째, 여호수아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이스라엘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친 아간의 제거를 기록한 것처럼, 사도행전은 성령님을 속임으로써 교회공동체의 순수성을 해친 아나니아부부의 제거를 기록하였다.

다섯째, 여호수아서가 하나님을 인정한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과 기생 라합과 같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기록한 것처럼, 사도행전 또한 복음을 수용한 이방인들의 구원을 기록하였다.

여섯째, 여호수아서는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국가 탄생을 기록한 반면, 사도행전은 새 언약 백성인 그리스도의 나라의 탄생을 기록하였다.

일곱째, 여호수아서와 사도행전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앞세워 펼치신 구원의 역사란 점에서 서로 잇대어져 있다.

베드로: 여호수아에 잇대어

베드로는 여호수아에 잇대어져 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제자로서 히브리인들의 열두 부족을 위해서 최초로 가나안땅의 시대를 열었다. 히브리인들의 가나안땅 정복은 여호수아서 1장 10-15절에 실린 여호수아의 설교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후의 이야기는 가나안땅 정복에 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도 사도행전 2장 14-36절에 실린 베드로의 설교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최초로 영적 가나안땅의 시대를 열었다.

여호수아서 1장 10-15절이 여호수아의 최초의 설교내용이듯이, 사도행전 2장 14-36절은 베드로의 최초의 설교내용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범을 알리는 최초의 설교를 베드로가 하게 된 것은 베드로가 교회의 문을 여는 열쇠(들)를 받았기 때문이고(마 16:16-19), 예수님이 놓으신 기초위에 첫 돌을 놓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그런 엄청난 자격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최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그 신앙고백이 바로 교회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베드로의 설교도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을 선포한 것에 불과하다.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이후에 선포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설교도 또한 이 믿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기초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 속에 담긴 몇 가지 교훈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오순절 날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15절은 성령강림이 일어난 시간이 유대인들의 제 삼시 곧 아침 9시경이었음을 말해준다. 이곳이 성전 뜰이었음은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성령강림사건이 발생한 시간이 몰려드는 인파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오순절 날, 아침 기도시간, 예루살렘성전 뜰이었다는 점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효과를 거두시려고 계획하신 사건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하루에 삼천 명이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들은 헬라인이나 유대인 모두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던 예비교육을 다 마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하나님은 사도들로 하여금 다른 언어를 구사하고 병을 고치는 등의 능력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집결시켜 주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 결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가 오실 자 메시아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표적이 일어났다.

넷째, 베드로의 설교 내용은, 메시아에 관한 구약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 예수님의 사역, 죽음,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 사건(방언 말함)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었다.

다섯째,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라는 촉구였다. 그러나 방언 말함이 수천여 명씩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게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한 엄청난 것이었지만, 성령을 받으라는 설교내용은 없었다. 성령님은 구원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 구약성경에 잇대어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성경에 잇대어져 있다. 가룟 유다의 자살 (1:15-26)이 응보란 점을 밝히기 위해서 다윗의 탄원시인 시편 69편 25절과 109편 8절을 묶어서 인용하였고, 예수님의 부활(2:25-28)과 승천(2:34-36)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의 즐거움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의 즐거움을 노래한 다윗의 찬양시편 16편 8-11절과 110편 1절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강림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뭄과 메뚜기 때로 인해서 몹시 고통을 겪던 유대민족의 회복에 관한 말씀인 요엘 2장 28-32절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인용구들에 대한 랍비들의 문자적인 해석은 사도들의 영적인 해석과 많이 다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랍비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모두 유대민족을 위한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반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누가를 빼고는, 모두가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의 예언을 모두 열방민족을 위한 영적인 의미, 곧 예수님에 관한 예표와 그림자로 이해하였다.

둘째, 구약예언자들은 자기 민족에게 회개가 필요한 현재와 회복이 필요한 장래에 대해서 말할 때, 모세가 전해준 구약 즉 율법에 잇대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이 전해준 신약 즉 복음에 잇대었다. 이 복음의 틀이 구약을 예표와 모형으로 보는 것이었다.

셋째, 시편 16편 10절을 인용한 사도행전 2장 27절의 전반부,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를 다윗 당시의 문자적 상황에서 이해한다면, “내 생명을 무덤에 버리지 아니하며”가 될 것이며,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보존을 말 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당시의 헬레니즘상황에서는 “생명”(soul)을 영혼으로, “음부”(Hades)를 죽음(영혼)의 세계로, 후반부의 “주의 거룩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님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 22-36절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22절)과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33절) 부어주신 오순절 날 성령강림이 그 증거란 것이다.

베드로는 17절에서 자기 시대를 “말세”로 인식하였다. “말세”란 메시아의 때, 곧 더 좋은 새 천년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이란 뜻이다.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이후의 시대, 곧 우상숭배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 시내산에서 옛 언약을 맺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새 천년시대였듯이, 세례 요한, 예수님, 사도들이 모두 내다봤던 새 천년시대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신앙(언약의 내용)을 고백하고, 침례(그리스도의 피 뿌림)를 받아 하늘 가나안땅의 시민이 되는 교회시대를 말한다. 교회개혁가들이었던 16세기의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칼빈, 19세기의 알렉산더 캠벨, 발톤 스톤 등도 새 천년시대를 바라본, 즉 자기 시대를 말세로 본 자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혁명을 꿈꾼 자들은 모두가 새 천년시대를 바라본, 즉 자기 시대를 말세로 본 자들이었다. 이처럼 더 나은 본향을 향해서, 광야를 순례하듯,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이 진정한 종말론자이다.

<성경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헛소리 말세론이나 종말론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종말론을 믿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새 천년시대를 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말론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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