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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9]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5(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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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544 2014.01.2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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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9]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5(행 3:1-10)

새 언약 백성의 새 예배(2)

유대교인들은 수천 년째 평일에 세 번, 보름날과 축일과 안식일에는 4번 이상 시간을 정해 기도한다. 누가는 그 시간을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로 못 박아 말하였다. 복음서저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신 시간과 흑암이 엄습한 시간을 각각 오전 9시와 3시 및 정오로 기록하였다. 첫 번째 기도회가 열린 오전 9시는 성전 문이 열리는 제3시를 말한다. 해가 뜬지 3시간째란 뜻이다. 두 번째 기도회는 오후 3시, 즉 해가 뜬지 9시간째에 열렸는데 성전에서는 저녁희생이 바쳐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들은 오늘날의 유대교인들이 갖는 기도시간과는 조금 다르다. 오늘날의 유대교인들은 해가 뜨면 바로 아침기도회(Shacharit:아침)에 참석하는데, 이 기도회가 가장 길다. 오후기도회(Mincha:제물을 바침)는 해가 뜨고 지는 중간시간 즉 정오와 해가 지는 시간사이인 오후 3시경에 드려진다. 저녁기도(Ma'ariv)는 해가 저문 다음 아무 때나 드릴 수 있다. 저녁기도는 오후기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저녁기도를 위해서 회당에 나갈 의무는 없다고 한다. 탈무드에서는 이 저녁기도회가 희생제사와 무관하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주후 70년 이후에 추가되었다고 전한다.

유대교인들의 기도문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유배됨으로 인해서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회당기도회를 위해서 작성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주후 70년 유대-로마전쟁에 패한 이후로 지금까지 성전이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회당기도회는 과거 2천 년간 더욱 굳어졌다.

야훼를 모신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만 허용되었다. 성막이나 성전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법궤)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 특권은 대제사장에게만 주어졌고, 그것도 대 속죄일 하루에만 허용되었다. 그것조차도 예루살렘붕괴와 유배당함으로 인해서 불가능해지자, 랍비들은 13세 이상의 유대교인 남성들에게 의무적으로 기도문을 낭송하게 하였다. 예전부터 자유로운 개인기도와 묵상기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 뼈아픈 상황은 유대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예배가 유대교예배와 많이 비슷하지만, 분명히 차이점도 있다. 그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교예배에서는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사라졌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예배에서는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삼고 있다.

둘째, 유대교예배에서는 성전제사를 기도문으로 대신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예배에서는 성전제사를 완성시킨 그리스도의 희생을 주의 만찬으로 기념한다.

셋째, 성전제사는 주후 30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고서도 40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당대에 아론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의 중보와 짐승으로 바치는 성전제사와 기도문만 낭송하는 회당예배에 흠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수난을 통해서 성전제사를 단번에 완성시키셨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또 그분을 통해서 누구나 차별 없이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 4:16) “새로운 살 길”(히 10:20)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을 알았다.

새 언약 백성의 새 예배(3)

이로써 유대교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차이점은 더욱 명백해졌다. 유대교인들의 회당예배는 더 이상 대제사장의 역할도 없고, 희생제사도 없는 단순한 기도회일 뿐이다. 유대교인들도 이 점 때문에, 비록 그들이 성전예배를 대신해서 기도문을 낭송하지만, 그들의 모임을 예배라고 부르지 않고 기도회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교회모임이 예배인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단 한번으로 영원히 완성시킨 희생제사, 곧 성전예배의 원형인 주의 만찬을 행하기 때문이다. 성전제사는 주의 만찬예배의 예표요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이 없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고, 많은 예배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말씀과 기도(찬송)만 있는 기도회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의식(ordinance)이고, 주님께서는 영으로써 예배 중에 함께 하신다.

이점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예배는 가톨릭예배와도 다르다. 가톨릭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제사를 바치는 성례전(sacrament) 예배이다. 미사를 집전하는 자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제사장’ 혹은 줄여서 ‘사제’라 부른다. 그리고 그들을 부제, 사제,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가톨릭예배가 이렇게 발전된 이유는 대외적으로 이방신전들에서처럼 제물이 없다보니까 이방인들이 신전도 없고 제물도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예배를 무신론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고, 내부적으로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의 만찬을 무용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부작용이 가톨릭예배를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제사예배로, 집례자의 성찬기도 직후에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성체신학(화체설)을 만들어냈고, 평신도 장로들이었던 목회자들을 사제로 발전시켜 부제, 사제,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으로 계급화 시켰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으로 일컫고 있다(벧전 2:9).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신성한 이름아래 높고 낮은 계급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식구이며, 일군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맡은 기능뿐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신 분(히 2:17), 승천하신 큰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히 4:14),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대제사장(히 4:15),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히 6:20),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히 7:26), “단번(단 한번)에 자기를 드려” 속죄를 이루신 분“(히 7:27),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히 8:1),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단 한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시고” 우리에게 그 길을 여신 분(히 9:11-12)이시다.

새 언약 백성의 위대한 삶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걷고 뛰게 된 이 엄청난 사건에서 우리는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첫째,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병든 상태를, 그의 내민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 걷게도 하고 뛰게도 한 사도들의 건강한 상태를 보여준다.

둘째,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미문(美門)에 앉아 구걸하였다. 미문은 유대인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전영내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이방인과 부정한 사람이 미문을 통과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미문에 들어서자마자 여성의 뜰이 있었고, 이 뜰을 통과하면 13세 이상의 유대인들만을 위한 이스라엘의 뜰이 있었다. 계명의 아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번제단과 성소를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었다. 사도들도 이곳에서 기도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셋째,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이방인이 아닌 신성한 영내를 출입하는 유대인들에게 구걸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를 일으켜 세워 구원시킨 것은 유대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다.

넷째,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전영내에 들어가 기도할 수 없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놓인 사람이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분명 유대인이었지만, 장애인이자 죄인이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지만, 이 사건을 영적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무지’라는 족쇄에 묶여 어둠 속에 갇힌 죄인에 비교된다. 반면에 사도들은 그를 어둠에서 끌어낸 지혜에 해당된다. 장애인은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했지만, 율법에 매인 유대인들은 그에게 동전 몇 닢을 던져 주었을 뿐, 그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그의 문제를 해결한 이들은 정작 은과 금을 갖지 못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장애인도 손을 내밀고, 가난한 그리스도인들도 손을 내밀었지만, 목적이 달랐고, 내민 손으로 할 수 있는 능력도 달랐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장애인의 내민 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장애인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7-8절).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 때문에 살아있고, 예수님 때문에 고침을 받았으며, 성령님 때문에 아직도 광야 길을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우리는 성도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사람들 때문에 복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희망의 증거가 된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때문에 누군가가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고, 우리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우리 때문에 누군가가 삶의 목적을 찾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며, 온 힘으로 일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어제의 추억이 있고, 오늘의 행복이 있으며, 내일의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향기 가득한 온기가 있고, 자비 가득한 은총이 있으며, 행복 가득한 미소가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위대성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유이다. 빛과 생명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살림의 일을 하시는 성령님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위대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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