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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10]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6(행 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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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940 2014.02.27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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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10]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6(행 3:11-26)

솔로몬 행각

성서에서 말하는 ‘이사’(異事) 혹은 ‘기사’(奇事)란 놀람이란 뜻이다.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놀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11절에서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달려 나온 곳은 여성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에 있던 유대인들이다. 이 기적을 관측한 사람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겠지만, 누가의 관심은 유대인들에게 쏠려 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다. 솔로몬 행각은 미문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이방인의 뜰 동쪽 끝자락 헤롯 성벽위에 세워졌으며,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회랑이었다. 솔로몬 행각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보거나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과 승천하셨던 감람산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 행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각별한 장소였다.

솔로몬 행각은 이방인들의 출입이 허용된 곳이었다. 이름의 유래는 솔로몬이 이곳에 큰 홀을 짓고(장 22.5미터, 폭 13.5미터), 그곳에서 재판을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율법사들이 모여 문답을 하던 곳이었다. 누가는 이미 복음서 2장 46절에서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서 ....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란 솔로몬 행각을 말한 것일 수 있다. 또 요한은 복음서 10장 23-38절에서 성탄절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닿는 그러나 서로 맞물려 있는 유대인들의 빛의 축제(수전절) 때 예수님이 이곳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과 설전을 펼치신 내용을 전하고 있다. 더욱이 누가는 본문 11절에 더해서 5장 12절에서,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적고 있다.

누가가 이처럼 솔로몬 행각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앞에서 언급된 이유들도 있겠지만,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솔로몬 행각을 언급할 때 초대교회 당시 지배적 철학이었던 ‘스토아’(stoa)가 연상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스토아’란 ‘주랑’ 또는 돌기둥을 뜻하는 말로써 강렬한 햇살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회랑 또는 행각을 말하며, 주로 이런 회랑에서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문답교육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스토아철학은 자연을 세계의 정신으로 보는 범신론이자, 제우스까지도 운명에 지배된다고 믿었던 숙명론이다. 자기부정의 금욕주의를 추구하면서, 유교의 칠정(七情)에서처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에 무감정 무관심할 것과 불교에서처럼 욕심을 버려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12절부터 26절까지는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내용이다.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사건은 놀랜(기사)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집회가 열리고, 말씀이 선포되는 효과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위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기다렸기 때문에 표적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신약성서에 “하늘로부터”란 말이 39번이나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튼 베드로와 요한은 이 절호의 기회를 예수님을 높이는데 활용하였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은 사람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계시적 사건이라고 담대히 밝혔다.

조상의 하나님

13절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적인 표현으로써 이방인 누가의 사도행전기록에 신뢰성을 높이는 표현이다. 또 “그의 종 예수”에서 ‘종’은 노예란 뜻이 아니라 예언자란 뜻이다.

모세오경에 ‘조상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12회 정도 나온다. 그만큼 ‘조상의 하나님’은 유대민족의식 깊이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다. 하나님은 급조되었거나 외국에서 수입된 신이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대대로 믿어왔던 하나님이란 뜻이다. 아버지가 믿었고, 할아버지가 믿었고, 증조부가 믿었고, 증조부의 할아버지가 믿었고,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믿었고, 믿었고, 믿었고, 믿었고.... 이렇게 조상대대로 믿어왔던 하나님이다. 이 표현 속에는 하나님이 오직 유대민족의 신이란 뜻을 담고 있다. 선민이란 그런 배타적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인들이 타민족을 이방인이라 부른 이유는 타민족에게는 신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널린 게 신이었고, 그 숫자가 3만이 넘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일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뛰어난 유대인들의 영성이 발현되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극복해야만할 위험한 배타적 사상이었다.

이것을 극복한 사람들이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베드로의 설교에 담긴 메시지가 바로 그들의 신사상이었다. 율법이란 족쇄에 묶여 참 빛을 보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선포된 두 번째 설교가 사도행전 3장 12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이다. 바야흐로 하나님이 새 언약백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선언,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선언, 그래서 새 언약백성이 되는 데는 민족성별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다는 선언, 이 위대한 선언이 베드로의 설교 속에 담겨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조상의 하나님신앙과 전통은 새 언약백성인 우리 기독교인이 세워나가야 할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요 힘겨운 과제라는 점, 우리가 어떻게 이 유산을 자손대대에까지 이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과제가 베드로의 설교 속에 담겨 있다.

사도행전은 이 위대한 유산의 지평을 넓혀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오랜 역사와 완고한 전통 속에 있던 유대교를 뛰어넘어 어떻게 기독교시대라는 새천년 시대를 열었는가를 보여준 이야기이다.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유대인의 구원의 하나님을 이방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그 지평을 넓혀간 이야기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고 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라고도 했다. 에베소서 3장 6절에서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함께 약속을 받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일찍이 유대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런 파격적인 선언이 계시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말한 내용이라고 했다.

최초의 신앙고백

베드로의 설교는 신앙고백이었다. 13-15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 “생명의 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로 고백되고 있다. 2장 22-36절의 첫 설교에서도 예수님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신 분, “부활”하신 분,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분으로 고백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만물을 회복하실 때”에 재림주로 강림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또 다른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사도들은 고백된 내용의 목격자(증인)들이었다(2:32, 3:15). 목격자로서의 증언은 사도들의 직무였다(1:8,22). 사도들의 대표였던 베드로의 설교는 증언이었다. 따라서 설교는 신약성서에 실린 사도들의 증언을 전달하는 수준이어야 한다.

둘째,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 때문에 또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16절) 때문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가? 구원 또는 구세주란 뜻이 아니던가?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

셋째, “회개하고 돌이켜....죄 없이 함을 받아야....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절), 그 때까지, 곧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1절)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만물이 새롭게 되는 날” 곧 주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보좌에서 기다리셔야한다는 뜻이다.

넷째, 19-21절이 후천년설을 암시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회개와 죄 사함이 먼저 있고난 다음에 “만물이 새롭게 되는 날”이 주의 재림과 함께 임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것을 목격한 5세기 초의 어거스틴과 역으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신대륙에서 신앙의 자유를 바탕으로 새천년시대를 기대했던 19세기 초반의 알렉산더 캠벨이 이 후천년설을 복음전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주의 재림이 있기 전에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때가 임할 것이다(사 11:9)라고 믿었다.

다섯째, 22-23절은 신명기 18장 15-19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제2모세 즉 그리스도시오, 그분이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을 맺게 하셨다고 믿었다. 또 “사무엘 때부터....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다”(24절)는 말씀은 초대교회가 구약성서를 예수님 중심의 영적인 해석 또는 구속사적인 해석을 했다는 증거이다.

여섯째, 25절은 유대인이 “언약의 자손”인 것은 확실하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한테까지 확대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26절은 모든 족속이 복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종” 곧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옛 언약시대를 닫고 새 언약시대를 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아 새 언약백성이 되는 절차를 새로 받으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는 예수님의 설교와 같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사상을 담는 새 부대가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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