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강52]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전망7(행 2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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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강52]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전망7(행 28:30-31)
사도행전의 기록목적
바울은 유력한 유대인들을 셋집에 초대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변호할 뿐 아니라, 집회를 열어 복음을 전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강론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20절)과 자신의 신학사상(22절)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23절). 그야말로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에게 권했던 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항상 힘썼다(딤후 4:2).
초대받았던 유대인들의 말을 통해서 당대에 교회가 처한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고 한 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받았던 박해상황을 언급한 말이다.
사도행전은 마침내 바울이 숙원인 로마에 입성했다는 사실로 끝을 맺고 있다. 이로써 1장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퍼지게 될 기반이 마련되고,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가 크게 발전될 것을 전망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닥쳐와도, 총칼의 위협과 탄압이 있어도, 지진과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복음의 행진은 지속된다는 역사가의 위대한 정신이 녹아져 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38-48쪽에서,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와 관련해서 골라진 사실들에 대한 뜻풀이라고 했고, 그 뜻풀이에 역사는 생명을 갖는다고 했다. 역사가의 능력은 해석하는 힘에 있다고 하면서 잘된 역사책은 정신을 밝혀주는 글이요, 잘하는 역사독법(歷史讀法)도 정신을 읽어내는 해석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역사가로서 누가는 우리에게 어떤 정신을 밝혀주려고 했는가?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주장들을 내놓고 있다.
첫째, 초대교회의 기원, 전파, 그리고 발전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다.
둘째, 그리스-로마세계를 향한 복음전도가 그 목적이다.
셋째, 지연된 재림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Conzelmann).
넷째, 바울을 언짢게 생각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Brandon).
다섯째, 박해자인 로마당국이 기독교에 대해서 갖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H. Sahlin, B. S. Easton).
여섯째, 박해자인 유대인을 향한 변증서이다(Hengel).
이런 설명이 부분적으로는 모두 옳지만, 그보다는 교회의 설립과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박해까지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자. 그래서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를 세워나가자.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삶과 정신에 잇대어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삶과 정신에 잇대어 살아가자”라고 설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듯싶다.
사도행전이 제시한 과제
누가는 오늘날의 이 시대를 교회시대로 이해하였고, 성령시대로 이해하였다. 성령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을 이끌어 중생의 거듭남(칭의)에로 인도할 뿐 아니라, 현재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축복을 미리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을 새 나라에로 이끌어 구원(성화)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성령님이 이끌어 온 역사요, 우리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역사조차 성령님께서 이끌어 오신 역사란 것이다.
따라서 종말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신속히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전개될 새 땅과 새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실 목적으로 여전히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더 이상 사단이 지배하는 절망의 나라로 달음질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인 희망의 나라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비록 배척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비록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십자가를 진 것 같은 고통일지라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며, 가던 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랬고, 바울도 그랬고, 앞서간 성도들이 다 그랬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인 20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이 제시한 과제는 이렇다. 바울이 예수님을 좇아 그분이 가신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좇아 밟았던 것처럼, 스데반이 예수님의 본을 받아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스데반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순례자의 길을 어렵다고 멈추지 말고, 힘들다고 멈추지 말고, 고통스럽다고 멈추지 말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기까지,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완주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사도행전을 계속해서 적어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깔끔하게 끝마무리를 하지 않고 열어 놓은 것은 사도들의 행전을 우리 성도들이 계속해서 써내려 가야한다는 암시였다. 새 언약 백성의 새 땅과 새 나라를 향한 진군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역대기하서가 사도행전처럼 끝마무리가 되지 않고 열려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성령님과 성도들의 활동을 통해서 지속되어져야한다.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전망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전망은, 누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적하였듯이, 무흠하셨던 예수님, 무흠했던 바울, 무흠한 그리스도의 교회,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색깔의 차별이 없고 값이 없고 은혜로 받는 구원의 복음, 구제와 섬김,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에 있다. 오늘날 새 언약 백성의 땅과 나라는 갈수록 작아지고 약해지고 있다. 어떤 나라가 힘이 약해지고 영토가 줄어든다면, 그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무흠하고 강했던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 우리 모두 회개하고 새 출발해야하지 않겠는가?
박해와 탄압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었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었던가? 박해와 탄압과 위기를 극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도록”(6:7) 하고,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 수가 더 많아지게”(9:31)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여지게”(12:24) 하고,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여지게”(16:5) 하며,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하지”(19:20) 않았는가? 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지”(28:31) 않았는가?
2,000년 전 기독교복음이 전래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로마인의 정신세계는 신화가 지배하였다. 중요한 사물의 이름들이 거의 다 신(神)의 이름으로 불릴 만큼 많았던 신들, 대표적인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神殿)들, 그리고 그들의 신심(信心)이 표현된 문화예술작품들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리스-로마 사람들의 98퍼센트가 유일신 야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리스는 동방교회, 로마는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양대 산맥이란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바울은 제1차와 제3차 선교여행 때 오늘날의 키프로스와 터키 서부 전역에 걸쳐서 교회들을 세웠다. 제2차 선교여행 때는 그리스 전역에 걸쳐서 교회들을 세웠다. 그리고 제4차 선교여행 때, 이때는 죄수로서 네로 황제로부터 재판을 받기 위해서 끌려간 처지였지만,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지장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로마교회는 서방교회로 일컬어지는 가톨릭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그리스는 동방교회로 알려진 그리스정교회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1,500년대에는 서방교회인 가톨릭교회로부터 개신교회가 분리되어져 나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초기 300년간 불법종교였고, 로마의 신들에게 충성을 바친 황제들로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결국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란 칙령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합법종교로 만들었으며,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이런 믿음의 원동력과 무흠한 순결성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새 언약 백성의 새 나라의 비전과 전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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