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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15: 하나님의 교회의 영성8(고전 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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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240 2015.03.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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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15: 하나님의 교회의 영성8(고전 7:10-24)

이혼에 대한 바울의 관점

이혼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남편과 부인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경우와 남편이든 부인이든 어느 한 쪽만 그리스도인인 경우로 나눠져 있다.

첫째, 남편과 부인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경우, 바울은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10절에서 “결혼한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 것으로써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명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서 선을 그어 말씀하신 것에 근거한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음행의 연고가 없는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자요, 그 버린 아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마 5:32; 19:8-9).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을 보호하는 측면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바울의 말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라”(10절)는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11절)에서 보듯이 이혼에 대한 여성의 능동적 의지가 남편과 동등함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혼하고자 하는 남편과 부인의 의지를 동등하게 규제하였다.

marriage_pompeii_couple.jpg 둘째, 남편이든 부인이든 어느 한 쪽만 그리스도인인 경우,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사견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불신자 배우자가 신자인 배우자와 함께 계속해서 살기를 원한다면, 구원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도 이혼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부부 모두가 그리스도인 경우와 어느 한쪽만 그리스도인 경우가 자녀들의 구원에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하기를 원한다면, 이혼하라고 충고하였다. 신자인 배우자와 불신자인 배우자 사이에 이혼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평이라고 하였다. 배우자 사이에 종교적인 이견이 있더라도, 두 사람 사이가 화평하다면, 배우자를 개종시킬 가능성이 있지만, 화평이 없다면 배우자를 개종시킬 가능성이 없으므로, 불신자 배우자의 선택에 따라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대응하라고 충고하였다.

바울과 동시대를 살았던 폼페이 부부의 초상화는 고린도교회를 출석했던 부부의 모습을 연상시켜준다. 초상화의 인물들은 빵집을 운영한 테렌티우스 네오 부부로 알려져 있다. 부인은 손에 철필과 서판을 들었고, 값나가는 옷차림에 귀걸이를 착용하였으며, 머리를 중앙에서 가르마를 타 곱게 빗어 넘겼고, 곱슬머리가락들을 이마와 목덜미 아래로 늘어뜨렸다. 남편 네오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V자형의 이마를 가졌으며, 남성답게 짧은 머리에 구레나룻을 갖고 있다. 토가차림에 파피루스문서를 말아 쥔 남편과 철필과 서판을 쥔 부인의 모습은 부부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시대의 여성의 사회적 신분

유대사회에서 모세가 명한 이혼증서는 가부장사회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함부로 내쫓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유대사회에서 이혼은 대부분 아내가 남편한테서 버림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피해가 전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특히 그것이 간음으로 인한 것일 때에는 여성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혼녀가 이혼증서를 지참하고 있다면, 그녀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줄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혼도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도록 한 것은 이혼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의 기본권이 크게 신장된 오늘날에도 이슬람권의 여성들은 여전히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다. 하물며 구약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이혼증서도 없이 버림당하는 여성들이 다반사였을 당시에 이혼증서를 주라는 모세의 율법은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기본권을 인정한 훌륭한 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유대인들에게 이혼을 당연시하는 법으로 악용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마 5:32; 19:6,9). 타고났거나 타의나 자의에 의해서 고자가 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독신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씀도 하셨다. 남녀가 짝을 이뤄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marriage_pompeii_lady.jpg바울시대의 여성은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헬라인이든 법적으로 사람이 아니었다. 노예가 주인에게 예속되듯이,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예속되었다. 여성에게 임신과 집안 일 말고는 법적 지위란 것이 없었다. 여자는 투표권도 없었고, 교육도 받지 못했다. 이혼이 흔했지만 여성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폭력은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주인은 노예를 때리고 강간했으며 학대했다. 가장은 부인과 어린 딸을 매춘부로 내몰기까지 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참금을 되돌려 받고 이혼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혼녀가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직업은 거의 없었다. 가난은 여성들을 매춘부의 길로 내몰았다. 매춘부의 대다수는 노예들이었고, 국가에 세금도 냈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무작정 당하고 산 것만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강했다. 심히 불평등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조차 여성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남편의 강력한 동반자로서 인생의 결정권을 행사하였다. 그림은 바울과 동시대를 살았을 폼페이 여성의 초상화로서 당대에 유행했던 곱슬머리에 금색 머리 망과 금 귀걸이를 착용하였으며, 손에는 철필과 서판을 들고 있어서 여성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신분에 대한 바울의 관점

바울은 스토아 철학이 발전했던 터키 남부지역 다소출생이기 때문에 스토아 철학에 익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토아 철학은 최고신인 제우스까지도 운명에 지배된다고 믿었던 숙명론이다. 자기부정의 금욕주의를 추구하면서, 유교의 칠정(七情)에서처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에 무감정 무관심할 것과 불교에서처럼 욕심을 버려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동시에 스토아 철학은 노예, 매춘부, 빈민처럼 힘겹게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선악과 행불행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가르쳤다.

slaves2.jpg바울은 17절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18-19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라. 20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말로써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명령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바울의 이 명령이 선악과 행불행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가르친 스토아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21-24절에서 바울은 그가 왜 그토록 매몰찬 명령을 했는가를 부언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비록 그들이 이 세상나라에서는 노예일지라도, 더 좋은 하나님나라에서는 자유시민이요, 하나님의 식구이기 때문에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비록 그들이 이 세상나라에서는 자유인일지라도, 더 좋은 하나님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칭하였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나라에서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자녀들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바울은 도망노예였던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와 동역자라고 호칭하였다.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로 여기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로 영접할 것을 간청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노소빈부귀천민족색깔에 상관없이 형제자매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나라는 뜨내기의 삶을 사는 세상일뿐이고,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살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신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옳고 마땅한 삶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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