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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2]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 조직(눅 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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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035 2012.10.3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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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2]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 조직(눅 6:1-19)

손 내밀기

누가복음 5장 5절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리는 수고를 하였지만 허탕을 쳤던 것의 대칭은 6장 12-13절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나라의 일, 복음의 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일, 빵의 일로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던” 어부들을 불러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삼으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밤을 지새우는가? 하나님의 일 때문인가, 사람의 일 때문인가, 가족을 위해서인가, 자기만족을 위해서인가? 기도하기 위해서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수고한 보람을 얻고 있는가, 마냥 허탕만 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밤이 새도록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삶의 목적, 방향, 소명, 사명, 성과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숙고하고 성찰하는가?

누가복음 5장 13절에서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문둥병자]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의 대칭은 6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그[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한 말씀이다. 여기서 문둥병자와 손 마른 자가 고침을 받은 기적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 5장 11절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후에, 또 5장 28절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른” 후에 일어난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할 것인가, 무엇을 내려놓아야할 것인가? 우리를 짓누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를 지치게 하고 탈진하게 만드는 삶의 무게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우리가 짊어진 무거운 짐들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는가?

손을 내밀어”와 “네 손을 내밀라”에서 도움을 주는 자나 도움을 받는 자 모두가 손을 내미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도대체 이 둘 사이에 어떤 역학(dynamics)이 있는가? 누가복음 5장 12절에서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와 13절에서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고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과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고칠 수 있다는 믿음과 고쳐주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서 만들어진 시너지(synergy)는 어떻게 효과가 나타났는가? “나병이 곧 떠났다”는 13절의 말씀에 그 대답이 있다. 5장 18-26절에서 중풍병자를 침상에 뉘인 채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협력자들의 돕겠다는 마음과 중풍병자의 고침을 받고 싶다는 마음과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합하여 만든 시너지는 어떻게 효과가 나타났는가? 25-26절을 보면, 중풍병자가 침상에서 일어나 그것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고, 그것을 본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사람과 예수님과 하나님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 반대의 결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났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마땅히 “손을 내밀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18:9).

생명 구하기

5장 24절에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의 대칭은 6장 5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말씀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은 안식일지라도 중단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모든 일을 중단해야하는 안식일일지라도 6장 9절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를 심사숙고할 것을 말씀하셨다.

안식일준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써 제4계명에 근거한다(출 20:8-11).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계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첫째,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를 구별하여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둘째, 이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출 20:10절). 셋째, 이 날에 하지 말아야할 일은 창조행위(Melacha)를 말한다. 천지창조 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7일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다(창 2:2).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멈추셨던 것처럼 인간들도 안식일에는 모든 창조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창조행위의 범주를 39가지로 이해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랍비들이 출애굽기 31-35장에 언급된 성막(Mishkan)건축에 필요한 39가지 공정에 착안하여 만들었다. 성막구조는 우주의 축소판이고, 성막제조는 창조행위를 상징하므로 그 같은 창조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누가복음 6장 1-5절에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이유는 안식일 법에 ‘자르기’나 ‘꺾기’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자르기’(Kotzair) 금지법은 안식일에는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을 가지나 잎 하나도 뽑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언급하신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 랍비들이 만든 안식일 법보다 우선되기 때문이었다.

또 6-11절에서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친 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인 ‘매듭풀기’(Matir) 금지법을 어기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3장 10-17절을 보면,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고치시고 나서, 분을 내며 책망하는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신 것은 안식일에 묶인 것을 푸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사함의 권세가 있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고발할 증거를 찾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6장 9절에서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의 참뜻이었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6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뽑아 사도라 칭하시기 전에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특징으로써 ‘손 내밀기’와 ‘생명 구하기’에 이어서 ‘기도하기’를 볼 수 있다. 누가는 ‘기도하기’가 예수님의 생활습관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누가는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는”(19절) 능력이 예수님의 이 기도습관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따라서 누가는 마가와 마태가 보도하지 아니한 부분, 즉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시는 것과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 놀라운 체험을 하셨고(3:21-22),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셨다(9:29)고 의도적으로 기록하였다. 또 누가는 예수님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하였다.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금식기도(4:1), 병을 고치신 후에 한적한 곳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도(5:16), 열 두 사도를 결정하시기 전에 철야기도(6:12), 제자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밝히시기 전에 홀로 기도(9:18),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기도(11:1), 베드로를 위한 중보기도(22:32),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22:41-46), 십자가상에서 박해자를 위한 기도(23:34), 그리고 임종 전에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기도(23:46)를 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간청의 기도(11:5-13), 끈질긴 기도(18:1-8), 그리고 겸손한 기도(18:9-14)에 대해서 비유로 가르치셨다. 이들 기도비유와 십자가상의 기도를 비롯해서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기도들이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된다.

누가복음 6장 12-19절의 중요성은 예수님이 실천해 보이신 ‘손 내밀기’와 ‘생명 구하기’ 그리고 ‘기도하기’로 무장한 평화군(Peace Corps)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다. 산에 오르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은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서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셨다. 여기서 긴 밤 지새우고 맞는 새 아침은 긴 암흑시대를 떠나보내고 새로 맞는 광명시대의 상징이다. 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의 사명은 다름 아닌 암흑시대를 떠나보내고 광명시대를 활짝 여는 것이다. 이 평화군의 선봉장들의 이름이 베드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요한의 형제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가룟 유다였다. 이들 가운데 시몬이 두 명, 야고보가 두 명, 유다가 두 명이었다. 17절을 보면, 이들이 평지의 전장(戰場)에 내려와 도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도열을 클로즈업시켜 보면, 평화군의 대장이신 예수님이 맨 앞에 서셨고, 몇 걸음 뒤에 열 두 사도들이 도열하였으며, 또 몇 걸음 뒤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 즉 예수님의 제자들의 큰 무리가 도열하였다.

이 평화군의 무장은 ‘손 내밀기’와 ‘생명 구하기’와 ‘기도하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물리쳐야할 적군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들이었다. 18-19절은 싸움에 대한 결과이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세상을 이길 힘이 무력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살롬(평화), 즉 손 내밀기, 생명 구하기, 기도하기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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