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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5]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 임무2(눅 7: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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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713 2012.11.0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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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5]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 임무2(눅 7:17-50)

세례 요한 이야기의 배경

누가복음 7장의 내용 가운데 가버나움 백부장과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소개되었지만, 나인 과부와 죄 가운데 살았던 여인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소개되었다. 귀먹고 어눌한 자의 고침(막 7:31-37)과 벳새다 맹인의 치유(막 8:22-26)가 마가복음에만 실린 이유나 이 두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만 실린 이유는 거의 동일하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들은 대개가 저자들의 관심과 전하고자하는 메시지의 목적에 따라 예화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그렇다. 마가는 귀먹고 어눌한 자와 벳새다 맹인의 고침을 소개함으로써 영이(靈耳)가 열리고 영안(靈眼)이 열려야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고백할 수 있고 밝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전하려했고, 누가는 예수님의 평화군의 임무가 소외계층에게까지 희년선포 즉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밝히려 했다.

누가가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도 예수님과 제자들인 평화군의 임무가 연민의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는 믿음의 일임을 밝히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태가 세례 요한의 이야기(마 11:2-19)를 소개한 이유는 새천년시대 즉 메시아시대를 학수고대하는 민중의 절박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특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는 말씀은 메시아시대의 개방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말하려한 것이었다.

누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임신과 출생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과 일군들의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이뤄져왔음을 말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경쟁관계로 보려하지 않고 성령님의 활동과 선지자들의 기도가 시너지를 일으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이뤄져갔음을 보여주려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1:17) 자로, 예수님은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실 분으로 소개되었다(1:71). 그 때문에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6)라고 밝혔다.

새천년시대 즉 교회천국의 도래를 선포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모형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과 히브리민족을 그 땅에로 인도한 모세였던 것과는 달리, 희년선포 즉 평화의 복음을 선포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모형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종교박해시대에 활동했던 엘리야와 엘리사였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숭배정책에 대항했던 선지자였다. 그리고 엘리야보다 두 배의 능력을 받았던 엘리사는 쿠데타로 아합 정권을 무너뜨리고, 백성에게 평화와 야훼신앙을 되찾아주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희년선포 즉 평화의 복음을 전하셨다. 엘리사의 취임으로 엘리야가 퇴임했듯이, 예수님의 취임은 세례 요한의 퇴임으로 이어졌다.

“이 세대의 사람” 이야기의 배경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메시아의 직책을 수행하시자, 세례 요한은 분봉 왕 헤롯 안디바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3:19-22), 참수당하기 전에 예수님이 펼치시는 사역과 성격에 대해서 듣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게 하였다.

세례 요한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에서 누가와 마태가 추가한 곳은 각각 한 곳씩이다. 누가복음의 경우, 29-30절로써,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은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예수님의 요한에 관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는데, 침례를 받지 아니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는 말씀이 추가 되었고, 마태복음의 경우, 11장 12절로써,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는 말씀이 추가되었다.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관한 언급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민중의 절박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민중이 광야에 나간 것은 세례 요한을 보려는 것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그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더욱 요동치게 할뿐이었다. 명품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명품 옷을 입은 사람들은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할뿐이었다. 위로를 구할 곳이 없던 민중이 보려고 했던 것은 메시아였다. 가진 자들과 통치자들은 메시아시대가 오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겠지만, 유대민중은 이미 600여 년간이나 그들에게 평화와 위로를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가 예수님이 원했던 방식의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예수님이 메시아 인자로서 민중에게 실현시켜 주고자 했던 ‘장차올 더 좋은 것’은 문자적이고 세속적이며 땅 중심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세적이며 천국중심의 영원한 안식과 평강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의 차이가 갈등과 충돌의 원인이었다. 예수님은 실재했던 갈등과 충돌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피력하셨다. 이 갈등과 충돌을 잘 이해하려면 광야사막에서 있었던 모세와 히브리민족의 갈등과 충돌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모세의 리더십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과 저항, 인간적인 욕구들의 분출들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고통의 땅 광야사막에 묻히게 하였다. 피리소리에 춤추지 않는 자들, 슬피 울어도 가슴 치지 않는 자들,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 자들, 이렇게 해도 비판하고, 저렇게 해도 비판하는 자들, 이렇게 말해도 안 믿고, 저렇게 말해도 안 믿는 자들, 이런 자들이 광야사막시대에 모세를 불신하고 저항했던 자들과 동일한 패거리이다. 가나안 땅 정복대열에 끼지도 못하였고, 또 땅을 얻지도 못하였던 자들처럼 예수님을 불신하고 저항하는 자들도 새천년왕국이든, 평화든, 희년이든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은 22절의 말씀처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희년의 복을 누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받아드렸든지 간에, 예수님은 이것을 메시아시대의 특징으로 선포하셨다.

죄 가운데 살았던 여인 이야기의 배경

유대인들은 낮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관습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여인이, 38절에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유대인들은 지상의 모든 것을 정한 것(kosher)과 부정한 것(treyf)으로 나눴으며,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일지라도, 죄인과 창기와 세리를 포함해서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천한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들로 보았다. 이들 부정한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멀리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한 거룩함 또는 의로움이었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바리새인의 상식으로써 시몬이 자기 동네에 잘 알려진 죄를 범한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하여 취한 행동을 옳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시몬이 심중에 생각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전통이고 관습이었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보존이 되듯이, 새 시대에는 새 패러다임, 새 가치관, 새 세계관, 새 사상이 필요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잘못되고 낡은 생각을 탕감비유로써 깨우쳐 주셨다.

예수님의 탕감비유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한 가지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려함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분이심을 밝히려함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5장 24절에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면서 하셨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20)는 말씀을 7장 48절에서 여인에게도 하셨다. 또 50절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위로하셨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서 말씀하셨다. 한 가지는 여인이 지은 죄를 질병과 동일시했다는 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갚아야할 채무와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11장 4절의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빚 지은, opheilonti, 오페일론티)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잘못을 저지른 죄, hamartia, 하마르티아)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했지만,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6장 12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오페일레마’)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빚들을 용서하여 주옵시고”라고 적었다. 헬라어 ‘오페일레마’는 경제적인 채무를 뜻한다. 마태처럼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질병을 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았고, 죄는 하나님께 갚아야할 채무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치는 행위는 죄를 사하고 빚을 탕감하는 행위와 동일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 시몬과 밥상에 함께 앉은 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심을 선언하셨다.

34절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 범한 여인의 접근을 물리치지 않으셨던 이유였다. 맛난 음식으로 대접한 바리새인 시몬보다 거룩한 척하고, 의로운 척하며, 죄 없다고 뻐기는 교만한 자들보다 중병에 걸린 것처럼, 많은 빚을 진 것처럼, 많은 죄를 지었던 여인의 눈물의 회개를 예수님은 훨씬 더 자신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영접한 행위로 받아드리셨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 5:20)는 말씀처럼 죄 가운데 살았지만, 눈물로 회개한 여인에게 희년이 선포되었고,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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