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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9]예수님의 신분노출과 십자가의 길(눅 9: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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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87 2012.12.0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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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9]예수님의 신분노출과 십자가의 길(눅 9:10-50)

신분노출과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Christ)임을 밝히신 후에 곧바로 예루살렘에 오르신 순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고,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받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밟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받으신 침례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침례와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가입하기 위한, 말씀을 듣고 믿고 회개한 죄를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한 개종침례이다. 이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시작되었다. 이 침례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는 죄를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한 침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받으신 침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받은 침례나 죄를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한 요한의 침례와는 성격이 다른 ‘그리스도 임직’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침례는 회개를 위한 것도 아니고, 교인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더더욱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이 받으신 침례는 ‘그리스도’로 세움을 받기위한 기름부음 즉 임직이었다. 구약시대에 올리브기름으로 하던 것이 침례의 물로 바뀐 것인데, 올리브기름이나 침례의 물은 영으로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외적 물적 표지일 뿐이다. 사무엘이 사울과 다윗에게 올리브기름을 머리에 붓고 안수하여 왕으로 삼았을 때, 하나님의 신(神)이 그들 위에 임한 것처럼,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을 때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신 것이며,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침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으로 성령님의 인침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 후에 곧바로 예루살렘에 오르신 행적은 그리스도인의 침례와 중요한 연관이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죽고 난 직후에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다. 그 이전의 활동은 갈릴리지역에서 이뤄졌고, 활동의 내용은 이 땅에 평화와 희년(禧年)과 만선(滿船)의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평화군으로 훈련시켜 파송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평화와 희년(禧年)과 만선(滿船)의 기쁨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셔서 순교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야 완성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믿고 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인’(Christian)임을 세상에 밝힘으로써 시작하는 삶, 즉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함으로써 이 땅에 평화와 희년과 만선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 삶이 하늘 예루살렘에 오르는 십자가의 삶 혹은 고난의 삶인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Christ)이심을 세상에 밝히시고 예루살렘에 오르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삶의 끝은 승리요 영광이기에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영광을 받으실 때”(요 12:23)로 누가는 “승천하실 기약”(눅 9:51)의 때로 밝혔던 것이다.

신분노출과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본래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표지(sign)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감당하라고 권면하셨다. 누가복음 9장 23절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을 살라고 권한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배교의 위협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해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로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섬길 수가 없었다. 둘째는 십자가를 진 후에 반드시 승리와 영광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수난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모든 사람의 주(主)로서 높임을 받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7-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또 로마서 8장 37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강조하는 방법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에 “자기의 십자가”(19:17)라는 표현을 썼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특별히 성도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마 16:24; 막 8:34; 눅 9:23)를 강조하였는데, 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란 낱말을 덧붙였고, 마가는 초대교회 성도의 한 사람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당시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일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강조했던 십자가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였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여 오르신 것처럼,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언덕으로 올라간 것처럼, 예수신앙 자체가 죽음을 의미했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복음서 저자들은 이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짊어지도록 설교하였다.

복음서의 이 “자기 십자가”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신앙생활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자기 십자가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신앙의 자기 십자가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신앙을 저버릴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요 승리의 지도자이시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결국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육적인 자기 십자가가 있다. 삶 자체가 십자가이다. 생로병사 자체가 고난의 십자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의 말씀처럼,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의 꿈을 이루게 될 줄로 믿는다(롬 5:3-4).

신분노출과 갈릴리사역의 마무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갈릴리에서의 활동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언급과 예수님의 신분노출과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점이다. 이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길에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십자가의 수난에 대해서 세 차례 예고하셨다. 이 세 차례 수난예고를 처음 소개한 저자는 마가이다. 그렇지만 마가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또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각각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표적들을 마태와 누가처럼 예수님의 그리스도신분노출과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마무리 짓는데 사용하지 않고, 빵의 문제와 세상의 일로 눈이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듣지 못하며, 혀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말하지 못하던 자들이 영의 눈이 열려 만물을 밝히 보고, 영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진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음을 강조할 목적에 사용하였다.

누가복음 9장 10-50절은 마태복음 14-17장까지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여기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눅 9:10-17, 마 14:13-21), 메시아신분 노출(눅 9:18-21, 마 16:13-20), 제1차 수난예고(눅 9:22-25, 마 16:21-26), 주의 재림에 관한 예고(눅 9:26-27, 마 16:27-28), 산에서 체험한 신령한 변화(눅 9:28-36, 마 17:1-8), 제자들이 못 고친 귀신 들린 소년의 이야기 (눅 9:37-43, 마 17:14-20), 제2차 수난예고(눅 9:43-45, 마 17:22-23), 수난예고 후 누가 크냐를 놓고 벌인 논쟁(눅 9:46-48, 마 18:1-5), 그리고 제자 요한에게 잘못된 열정을 책망하신 내용이다(눅 9:49-50).

이 부분의 기록에서 누가복음이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과 다른 점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따로 기도하실 때”를 강조한 점, 9장 23절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에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날마다”를 추가한 점, 산에서 체험한 신령한 변화 즉 용모가 변화되고 옷에 광채가 나며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는 체험도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 발생된 일로 강조한 점이다. 누가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예수님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기도할 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질 수가 있고, 또 신령한 체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자신을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 정체를 밝힌 후부터는 하늘 예루살렘에 오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이 하늘 예루살렘에 오르는 삶은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는 삶이고, 이 땅에 평화와 희년(禧年)과 만선(滿船)의 기쁨을 주는 삶이다. 그 삶이 하늘 예루살렘에 오르는 십자가의 삶 혹은 고난의 삶인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밝히시고 예루살렘에 오르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삶의 끝은 승리요 영광이기에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영광을 받으실 때”(요 12:23)로 누가는 “승천하실 기약”(눅 9:51)의 때로 밝혔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진 후에는 하나님의 대전(大殿)에 올라 생명의 월계관을 받아쓰고,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계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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