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24]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1(눅 11:1-4)
본문
[눅강24]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1(눅 11:1-4)
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에서 탄생되었다. 스승의 기도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모형은 모세의 기도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모세는 히브리민족을 노예의 삶에서 해방시켜 광야사막에서 40년간 이끌면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모세는 기도의 능력으로 히브리민족을 지상 가나안땅에 입성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모세의 원형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백성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광야교회로 인도하여 하늘 가나안땅에 입성시킬 구원의 길을 닦기 위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암송기도이다. 바벨론 유배이후 성전예배를 대신할 회당기도회가 시작되고, 유대교의 랍비들이 ‘베라코트’(berakhot)라 불리는 기도문들을 만들기 전에는 개인기도가 일반적이었다. 아브라함의 기도(창 18:23-33: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기도), 야곱의 기도(창 32:22-29: 얍복강가에서의 기도), 모세의 기도(출 8:12-13, 출 8:30, 15:22-25, 17:11-16, 32:7-14, 33:8-11, 민 11:1-2, 12:9-14, 16:20-24), 여호수아의 기도(수 10:12-14: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한 기도), 한나의 기도(삼상 1:10-20: 사무엘을 얻기까지의 기도), 다윗의 기도(시 51:1-19: 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회개기도), 솔로몬의 기도(왕상 3:4-14: 지혜를 구하는 기도), 엘리야의 기도(왕상 18:16-46: 갈멜산에서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왕하 20:1-11: 여호와께 심히 통곡 기도함), 에스더의 기도(에 4:16: 죽으면 죽으리이다), 다니엘의 기도(단 6:1-28, 하루 세 번의 기도), 욥의 기도(욥 42:1-6: 욥의 회개기도) 및 요나의 기도(욘 2:9: 요나의 회개와 서원기도)가 있다.
주기도문은 유대인들의 암송기도문들을 대신한 초대교회의 유일한 암송기도문이었다. 예배 때 대표기도를 맡은 자는 오늘날의 개신교 예배에서처럼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자유롭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것이 교리논쟁이 격화되면서 이단들의 침투를 차단한다는 명분하에 대표기도가 사라지고 유대교의 회당예배에서처럼 틀에 박힌 기도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전통교회들은 아직도 예배 중에 공인된 기도문만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예배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예수님은 친히 개인 기도를 즐기셨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에 힘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은 유대교의 랍비들이 만들어준 기도문에 익숙한 제자들이 그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신 스승의 기도문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에는 뛰어난 랍비들이 학파의 제자들을 위해서 모범기도를 만드는 사례들이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한 것은 자연스런 요청이었다. 이 요청에 응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8개나 되는 긴 유대교의 쉐모네 에스레이보다 내용이 뛰어나면서 간략하여 암기하기 쉬운 모범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누가복음보다 20여년 정도 늦게 시리아에서 기록된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는 주기도문을 하루 세 번 암송하도록 권면하고 있어서 주기도문이 유대교의 쉐모네 에스레이를 대신한 기도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의 주기도문과 마태의 주기도문의 차이점
누가복음 11장 2-4절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에 나오는 주기도문보다 훨씬 짧다. 마태의 주기도문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 누가의 것에 추가된 부분이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는 본래 마태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이 영송에 ( )표시가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누가의 “날마다 일용할 양식”이 마태의 것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바꿨고, “죄지은 모든 사람”이 “죄지은 자”로 바꿨다. 또 누가의 것에서 “우리에게 죄지은”의 죄가 ‘빚 지은’(opheilonti, 오페일론티)이고, “우리 죄도”에서 죄는 ‘잘못을 저지른 죄’(hamartia, 하마르티아)인 것에 반해서 마태의 것에서는 경제적 채무를 뜻하는 ‘오페일레마’(opheilema)만 쓰였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이 왜 생겼는지를 네 가지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
첫째, 누가의 주기도문이 마태의 주기도문보다 더 원시적이고 원형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선포하신 ‘성만찬 제정사’도 그렇고, 주기도문도 짧은 것이 긴 것보다 더 원시적이고 원형에 가깝다.
둘째, 누가의 것은 안디옥교회의 것을, 마태의 것은 시리아지역 교회의 것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마태복음이 시리아 지역에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안디옥교회의 것이 ‘주의 만찬 제정사’도 그렇고 주기도문에서도 더 원시적이고 원형에 가까운 이유는 바울과 누가가 이 교회의 출신인데다가 두 사람이 함께 활동을 시작한 때가 신약성경 27권의 어느 한 권도 기록되지 아니한 40년대 말일만큼 시기가 빠른 반면에 마태의 것은 이보다 십 수 년 뒤진 시리아지역 교회의 것을 반영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예루살렘교회의 것에 뿌리를 두고 있고, 예루살렘교회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셋째, 마태복음보다 십 수 년 늦게 기록된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란 책은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시리아지역 교회에서 기록된 소책자인데, 이 책에 기록된 주기도문이 ‘하늘’과 ‘빚’의 복수명사가 단수로, “사하여 준 것같이”가 “사하듯이”로 바뀐 것 말고는 마태의 것과 동일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의 영송에 ( )표시가 없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쉐모네 에스레이를 세 번 암송하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도문을 하루에 세 번씩 암송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누가의 주기도문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1세기 말 시리아 교회들이 예배용으로 다듬어 사용한 기도문으로써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 낭송하는 쉐모네 에스레이를 대신한 것일 수 있다. 이밖에도 <디다케>는 유대인들이 안식 후 둘째 날(월요일)과 다섯째 날(목요일)에 갖는 단식(눅 18:12) 대신에 주간 넷째 날(수요일)과 준비일(금요일)에 단식하도록 권하고 있어서 주기도문을 쉐모네 에스레이를 대신할 기도문으로 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어 월요일과 목요일에 토라를 낭독한다.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유대교의 쉐모네 에스레이의 차이점
누가의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여”는 쉐모네 에스레이 5,6,19번에도 있다. 또 “이름이 거룩히”는 쉐모네 에스레이 3,18번에 비슷한 표현이 있고, 613개의 계명들 가운데 4,5번의 계명으로써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는 레위기 22장 32절에 근거한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그 이름’이란 뜻의 ‘하쉠’(Ha-Shem)을 자주 사용하였다.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쉐모네 에스레이 14,15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다가올 문자적인 나라만 있을 뿐, 이미 임한 현재적인 영적인 나라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한다.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쉐모네 에스레이 9번에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우리가 필요로 한 것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란 뜻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빵을 구하는 기도이다. 여기서 빵은 영혼과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대표한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매일 내리는 만나에 의지하며 살았듯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손에 의지해서 살고 있다는 겸손의 고백을 담고 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는 쉐모네 에스레이 5,6번 기도에서 발견된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우리나라 음력 8월 1일 또는 9월 1일에 닿는 신년(로쉬 하샤나)이 되면, 열흘 동안 지난해에 지은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고, 또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관행이 있다. 그러나 동해보복법이란 피의 보복문화에 젖어 살았던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볼 때 예수님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는 쉐모네 에스레이의 결론 기도문, “나의 하나님이시여, 악으로부터 나의 혀와 또 거짓되게 말하는 입술로부터 보호하소서.”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배교의 위협 속에 살고 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기도해야 한다.
누가는 “우리에게 죄지은”에서 죄를 ‘빚 지은’(opheilonti, 오페일론티)으로, “우리 죄도”에서 죄를 ‘잘못을 저지른 죄’(hamartia, 하마르티아)로 소개한데 반해서, 마태는 둘 다 ‘빚 지은’을 뜻하는 ‘오페일레마’(opheilema)를 사용하였다.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형제들의 빚을 탕감하여 줌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잘못들을 용서하여 달라는 간구를 담았다. 반면에 재리(財利)에 밝은 유대인일 뿐 아니라, 세리였던 마태는 죄를 하나님께 갚아야할 채무로 이해하였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에서만큼은 의견대립을 갖지 않는다. 적어도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만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된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기원하며,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일용할 모든 것들을 채워달라는 간구를 매일 겸손히 드릴 때 하늘 가나안땅에로의 오름을 가로막는 세력을 우리는 능히 물리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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