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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0]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6(눅 1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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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600 2013.02.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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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0]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6(눅 13:1-35)

회개와 열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일컬어 누가문서라 부른다. 누가문서의 테마는 순례, 성령, 기도, 배척이다. 순례는 예수님과 바울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주로 말한 것인데,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예수님의 여정을 9장 51절부터 19장 44절까지, 전체 24장 가운데 10장, 전체 분량의 42퍼센트를 담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예수님과 초기교회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이다. 예수님은 주로 유대인들을 상대로 사역하셨고, 바울과 누가는 주로 헬라인들을 상대로 사역하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갈릴리와 예루살렘 또는 예루살렘 멸망과 같은 교훈들은 대개가 문자적이고 역사적이지만, 헬라인인 누가에게는 또 그가 섬기는 헬라인들에게는 그것들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교훈적인 뜻풀이와 의미가 담긴 해석이 더 중요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순수역사)과 기록된 사건(해석역사)의 차이점이다.

이 점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과정이나 바울이 3차 선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오르는 과정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예루살렘에 오르는 과정의 모범이자 상징이다. 이 점에서 누가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가나안땅에 오르는 천로역정(天路歷程)이다. 따라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나라’가 사용된 빈도수가 매우 높게 나타나 있다. ‘예루살렘’의 경우, 누가복음에 30회, 사도행전에 58회, 총 88회 사용되었는데, 신약성서 전체 138회 가운데 64퍼센트를 차지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경우, 누가복음에 27회, 사도행전에 4회 총 31회 사용되었는데, 신약성서 전체 56회 가운데 5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36회 사용된 ‘천국’까지 포함시키면, 전체 93회 가운데 누가문서가 33퍼센트를, 마태복음이 43퍼센트를 차지한다. 누가복음 13장에서만 ‘예루살렘’이 4회, ‘하나님의 나라’가 3회 언급될 정도로 이방인기독교에 집중한 누가문서에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나라’가 오히려 월등하게 더 많이 언급되었다.

하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가로막는 마귀의 저항과 방해공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단단한 무장이 필요한데, 기도와 성령 충만이 가장 중요한 장비로 언급되었다. ‘영’과 ‘성령’이 누가복음에 38회, 사도행전에 69회, 도합 107회나 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 168회 가운데 64퍼센트를 차지한다. ‘간구’와 ‘기도’는 누가복음에 28회, 사도행전에 30회, 도합 58회나 된다. 신약성서 전체 113회 가운데 절반이 넘는 51퍼센트를 차지한다.

이것들에 더해서 누가는 예수님의 회개촉구의 말씀들을 13장 1-9절에 배치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와 열매로 무장할 것을 촉구한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리게 될 것(7,9절)을 경고하셨는데, 무화과나무로 상징된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멸망을 실제적 상황에서 경고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는 유대인을 향해서 회개를 촉구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교회는 영적으로 참 이스라엘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과 기록된 사건의 차이점이다.

새 패러다임

누가는 헬라인으로서 문자적으로 지상 예루살렘보다는 하늘 예루살렘에 더 관심이 컸다. 누가복음은 기독교직전시대에 대부분 유대인들을 상대하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지만, 기독교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할 목적으로 뜻풀이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헬라인들은 3만이 넘는 신들을 소재로 꾸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종교문화를 형성시켰던 사람들이다. 제우스를 포함한 12신들의 거처는 올림포스 산 정상이었다. 신들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든지, 그들의 거처가 영원한 영적 세계라는 개념은 약했다. 헬라인들은 물질은 물론이고 추상적 개념인 사랑, 증오, 지혜, 응보와 같은 것들까지 신화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신들이 인간들보다 능력이 많고 초월적인 것 말고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라의 신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종교적이고 교훈적일 수는 있었지만, 철학적 정신적 영적 부분은 약했다. 그런 약한 부분을 채워준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사상이었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보이지 않는 본질세계의 그림자와 모형으로 보았다. 물질세계는 유한하고 변하며 변질될 수 있지만, 본질세계는 영원하고 불변하다고 보고, 이것을 이데아세계라고 불렀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들은 모두가 본질이고 참인 이데아세계의 그림자란 것이다. 그리고 이데아세계가 바로 영적 지적 세계요, 빛과 생명의 세계요, 본질과 참의 세계라고 믿었다. 여기서 현세와 내세를 구별하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이 점에서 헬라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하나님나라를 영적 세계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누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께 속한 곳(2:22), 예수님이 올라가 머물러계실 곳(2:41,43), 예수님이 속량하실 곳이다(2:38). 또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찾아 올라가야할 곳이다(2:45). 그런데 마귀는 성전 자체이신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했고(4:9), 예루살렘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그의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왕이 되셔야할 곳을 처형장소로 삼았다(눅 9:31,51,13:22). 이것은 아이러니이면서 동시에 역설이다. 예수님은 지상 예루살렘의 유한한 왕이 아니라, 하늘 예루살렘의 영원한 왕이 되실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마귀와 그에게 동참한 자들이 실패자요, 하나님의 구원프로젝트에서 악역을 담당한 자들이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돌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루살렘은(눅 13:34, 18:31) 그 대가로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힌(눅 21:20,24) 곳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볼 때, 실망과 좌절로 인하여 떠났던 자들이 희망을 품고 돌아가야 할 곳이다(눅 24:33).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눅 24:47) 곳이다.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눅 24:52-53)해야 할 곳이다. 궁극적으로 이곳은 하늘 예루살렘이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의 틀(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교훈하려고 10-21절에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교한 말씀을 배치한 것이다.

좁은 문

예수님이 이스라엘멸망을 경고하면서 촉구하신 회개는 무엇을 말씀한 것인가?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법들을 어기고 있는 것을 회개하라고 촉구했다. 불법이 이스라엘멸망의 제1원인이라고 성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회개촉구는 계약법과 관련이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한이 지난 율법에 매인 폐쇄적 사고로 자신을 배척하고 새 언약시대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회개를 촉구하셨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22-35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는 길을 제시하시고, 이를 거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단순히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신정국가를 의미할 뿐이다. 유대인들에게 본래 영적인 개념은 없었다. 유대인들에게 영적인 개념이 생긴 것은 구약성서의 기록이 끝난 다음인 헬라시대였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나안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져있다. 그들의 조상은 떠돌이였고 노예였다. 비록 모든 조상들이 떠돌이였거나 노예는 아니었을지라도, 민족사의 대부분이 떠돌이와 노예의 세월이었다. 그들에게 땅은 안식과 자유의 상징이다. 그것을 약속하신 분이 야훼이시고 주신 분도 야훼이시다. 그 대신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그 약속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책이 구약성서이고, 그 몸부림이 ‘게자이로트’(Gezeiroth)로 불리는 율법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땅은 어떤 경우에도 영적일 수 없고, 반드시 문자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유대교에서보다는 초기교회에서 발전된 개념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유배이후 희망하게 된 다가올 세상 ‘올람하바’(Olam Ha-Ba)는 예루살렘에 회복된 다윗왕국이요,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예배와 유대교를 국교로 한 신정국가이다. 그러나 초기교회의 유대인 사도들은 그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유대인들만의 국가가 아니라는 새롭고 열린 사고(패러다임)를 가졌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는 하늘 가나안땅이요,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색깔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 가나안땅에 회복될 문자적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하늘 가나안땅에 이미 세워진 영적 이스라엘 나라를 말한다. 또 이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다.

예수님은 이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눅 4:43). 예수님은 이 나라가 가난한 자들이 복을 받는 나라(눅 6:20),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는 나라가 될 것이고(눅 9:2), 곧 세워질 교회는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죽기 전에 볼 자들이 있을 것이며(눅 9:27), 이 나라가 가까이 와있다(눅 10:9, 11)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유이다.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 배타주의를 폐쇄적인 율법주의 때문으로 보았다. 교회는 주후 30년 5월 28일 오순절 날에 시작되어 주후 70년 예루살렘멸망 때까지 유대인들로부터 강한 탄압을 받았다. 이후 물리적 탄압이 불가능해진 유대교 랍비들은 기독교를 이단시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하루 세 번 제사를 대신하여 드리는 기도문 ‘쉐모네 에스레이’에 추가하여 기독교를 멀리하도록 하였다. 이 악연은 지난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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