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33]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3(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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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3]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3(눅 15:11-32)
아버지의 심정
탕자비유의 핵심은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집을 지킨 맏아들도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이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도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이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차별이 없는데 반해서 두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서로 다르고, 형제사이에 생각하는 마음도 서로 다르다.
이 두 아들에서 신구약성경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맏아들은 유대교인들의 대표로서 이 맏아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 구약성경이다. 탕자는 이방인들의 대표로서 이 탕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 신약성경이다. 맏아들의 입장, 즉 선민의 입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이해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고, 탕자의 입장, 즉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이해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맏아들이든, 탕자든 다 아버지의 동일한 사랑을 받는 자들이란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탕자 또는 이방민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율법적이 될 수도 있고, 복음적이 될 수도 있다. 율법적이란 맏아들의 태도를 말하고, 복음적이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간 탕자의 심정과 밤낮없이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을 말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탕자도 하나님의 자식이란 점이다. 그는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니라, 집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자이다. 20세기의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탕자를 일컬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하였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란, 칼뱅의 주장처럼,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은 탕자가 구원받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기독교인들은 탕자를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시기 직전에 울부짖으며 하신 말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이다. 인류를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잠시 동안 외면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셨다고 판단할만한 정황은 그 어떤 곳에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영광을 얻으셨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결과이다.
칼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 선택과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기 자신에게는 ... 버림과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적었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인가? 저주와 죽음을 당해야할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신 반면, 하나님 당신께는 인간이 당해야할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예정하신 반면, 하나님 당신께는 인간과의 사귐을 예정하셨다고 하였다. 이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취하신 대신에 당신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신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다.
역할에 대한 성찰
연속극이나 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삼각구도가 성경에서도 자주 쓰였다. 하나님과 사람과 뱀,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야곱과 라헬과 레아, 예수님과 마르다와 마리아, 주인과 빚진 종과 그의 동료, 부자와 나사로와 아브라함,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유대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죄인들과 예수님 혹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와 예수님과의 삼각구도가 대표적이다. 예수님은 가진 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반면, 갖지 못한 자들을 옹호하시고, 위로하시며, 밥상교제까지 나누셨다. 오죽했으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눅 7:34)는 비난을 받았겠는가?
복음서를 잘 읽는 방법은 삼각구도의 역할들, 즉 죄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역할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삼각구도에서의 역할들이 제대로 파악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죄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만을 부각시킨 채 바리새인들의 역할을 도외시하거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관계만을 부각시킨 채 죄인들의 역할을 도외시하면 복음서이야기를 균형감을 가지고 읽을 수 없다. 보통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율법주의자들로 여겨서 도외시해버리고, 회개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만을 부각시킨다. 또 은혜를 받은 사람치고 죄인의 자리에 자신의 역할을 대입시키지 않는 사람이 없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 혹은 예수님의 자리에 자신의 역할을 대입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실생활에서 자기도 모르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역할에 빠진 사람이 많고,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역할을 맡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역할 또는 하나님의 역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외시된 역할이자, 반드시 채워져야 할 역할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역할을 좋아할 그리스도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좋다든지, 믿음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자기우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그런 자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들 중에도 자기우상에 빠진 자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 역할에 대한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이다. 은혜를 받았다는 점에서 보면,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역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맞고 또 필요할 수가 있지만, 예수님의 의도나 복음서 저자의 의도는 예수님의 역할 또는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맡아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충고하셨고(마 6:8, 23:3), 반면에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으라(살전 1:6, 롬 15:4, 고전 11:1, 빌 3:10, 딤후 1:13)고 수차례 권면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본받으라(엡 5:1)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두 아들의 아버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추천하신 아버지의 심정은 실패하고 돌아온 아들을 조건 없이 환대한 사랑,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는 맏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이해하라시면서 맏아들의 불평까지 감싸 안는 너그러움,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아들을 모두 포용하는 넉넉한 마음이었다.
탕자의 심정
탕자의 비유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갖자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두 아들인데, 이 두 아들에게는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할 마음도 있고, 꼭 본받아야할 마음도 있어서 양면적이다.
첫째 아들은 순종적이고 모범적이며,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어 보인다. 맏아들의 훌륭한 점은 유대인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 하나님을 사랑”(막 12:30)하여 613개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계명들을 무의식적으로 범하지 않도록 수많은 울타리 법들까지 부지런히 지킨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맏아들의 잘못된 점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눅 18:9) 바리새인한테서 찾을 수 있고, 집나간 동생을 걱정하기보다는 아버지가 자기만의 아버지가 되었고, 재산의 상속권이 자기에게만 있다는 독점의식과 배타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픈 마음이 커서 집안일에 무책임했고 열정도 헌신도 없었다. 생각이 온통 방탕한 삶에 있었다. 이 둘째 아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거부한 이방인들과 죄인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아들한테서 본받아야할 것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점이다. 둘째 아들의 훌륭한 점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회개한 세리한테서 찾을 수 있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8-21)라고 말한 탕자한테서 찾을 수 있다.
아버지는 탕자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로 여겼다. 이 24절의 말씀은 ‘죽음’을 ‘잃음’으로, ‘삶’을 ‘다시 얻음’으로 설명한다. 또 ‘죽음’과 ‘잃음’은 관계단절을, ‘삶’과 ‘다시 얻음’은 관계회복을 말한다. 아버지를 떠난 것과 아버지에게서 멀어진 것을 ‘죽음’과 ‘잃음’으로,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온 것을 ‘삶’과 ‘다시 얻음’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죽음을 단절로, 생명을 회복으로 설명한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단절을 뜻하고, 영혼의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단절의 원인은 무엇인가? 성서는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탕자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깨진 관계는 회복되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생명을 다시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는 말씀이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통회하는 심정이다. 탕자가 궁핍하여져 굶주릴 때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떠나온 아버지를 생각하고 뉘우친 것처럼 자기 죄를 회개하는 심정이 필요하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의 마음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하는 세리의 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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