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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9]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1(눅 19: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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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869 2013.03.13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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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9]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배척1(눅 19:11-48)

오름의 시작과 끝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행진은 갈릴리를 출발하여 예루살렘 시온에로 향하는 오름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시온이 끝은 아니다. 아직도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이라 불리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따라 오르는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다. 이 골고다 언덕도 끝은 아니다. 가장 고통스런 십자가에로의 오름(못 박힘)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은 아직 아니다. 동굴무덤에 묻혔다가 부활하여 하늘 보좌에로 오르는 영광의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의 때를 영광 받으실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설적 삶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역설적 삶이다.

높은 산은 대개가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밧줄을 의지할 만큼 급경사인 경우가 많다. 정상을 밟으려면 남은 힘을 다 쏟아부어야한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30킬로미터이며 오르막길이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60미터 낮은 곳에 있고, 예루살렘은 760미터에 있어서 고도차가 1,020미터에 이른다. 오아시스를 떠나 돌산을 향해 오르는 험난한 길이요, 강도가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다.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에 가깝지만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야하는 길이다.

11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다”고 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벨론포로기 전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이 선포한 메시아왕국이요, 신정국가이며, 회복된 다윗왕국이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를 ‘올람하바’(Olam Ha-Ba)로 부른다. 이 나라는 교회가 아니고, 천국도 아니다. 이 나라는 빼앗긴 땅을 되찾고, 주권을 회복하며, 성전예배가 온전히 회복된 유대왕국이다. 유대인들은 그 나라를 종종 하나님의 나라로 불렀다. 유대교를 기반으로 한 신정국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가 제2모세 또는 제2다윗에 의해서 세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메시아이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신 목적이 이 예언의 성취를 위함이라고 믿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으니, 혁명을 위한 전쟁은 곧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도 곧 세워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기대였고 절박한 희망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희망이다. 그러니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들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누가 높은가를 놓고 다퉜고, 서열을 정하려는 암투가 벌어졌으며, 다른 제자들 몰래 예수님을 찾아가 자리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흥분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유대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마 9:36)해 있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마 4:16).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마 9: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대가 옳지 않다는 것을 어떤 모양으로든 교훈하실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우실 나라는 문자적인 지상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하늘나라였다. 그것은 문자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이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혁명가가 되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였다.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할 당시에는 메시아인 제2의 모세 또는 제2다윗의 출현에 대한 기대가 유대인들 가운데 충만하였지만,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충만하였다. 메시아인 제2모세 또는 제2다윗의 출현이 수백 년간 지연되었듯이, 곧 돌아오실 것 같았던 예수님의 재림도 지연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을 궁금해 하였고, 설명을 듣고 싶어 하였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열 므나 비유를 통해서 지연되고 있는 재림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열 므나 비유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지만, 누가가 이것을 복음서에 소개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반세기가 지난 자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반세기가 지난 누가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말씀하신 것이 되고, 2천년이 지난 우리에게까지 말씀하고 계신 것이 된다. 이것이 역사기록의 진가이고 역사해석의 중요성이다.

누가의 역사해석은 이 시대가 교회시대요, 성령시대이며, 은혜시대요, 구원받을만한 시대란 것이다. 성령님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는 잠정적인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을 자들의 공동체이다. 성령님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선수금)하시고 인(인감)치시며 하늘의 평화를 맛보고 마음천국을 누리도록 인도하신다. 이뿐 아니라,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낙원에로 인도하신다. 낙원도 잠정적인 하늘의 하나님의 나라요,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을 구원받은 영혼들의 공동체이다. 우리가 교회와 낙원을 잠정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나라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는 교회시대가 지속되어질 것이고, 낙원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복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열 므나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바라는 동안 장사 즉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충실히 하라는 말씀이다.

11절에서 “예루살렘에 가깝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한” 것은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역사적 정황이요, 문자적 사실인 동시에 누가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요 생각이었다. 초대교회가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던 것은 사실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열 므나 비유를 소개함으로써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서 장사 즉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12절에서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간 “어떤 귀인”은 예수님이시다.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의 일을 맡기셨다. 증인의 일이란 “위로부터 능력으로” 덧입힘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눅 24:47-49)되는 복음장사를 말한다. 이 장사는 13절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지속되어야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복음장사에 따라서 상을 주시고, 악인들에게는 심판이 따를 것을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하늘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17절)하는 종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끝은 하늘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우편보좌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환영하였지만(37절), 누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가까이”란 표현만 썼다. 여리고(11절)와 베다니에서 썼다(28절). 이밖에도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29절)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란 표현을 썼다. 이처럼 누가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을 뿐이지, 입성하신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28절)고 적었다. J장군 예수님이 평화군을 진두지휘하고 계심을 보여준 것이다. 누가복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0:9,11, 21:31)는 표현이 몇 번 나온다. 이것과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11절)에 어떤 뉘앙스가 있어 보인다.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하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 아니고 가까이에 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맥락에서 “제자의 온 무리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부른,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7-38절)는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 이 찬양은 마가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9-10)와 마태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와 조금 다르다. 누가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했는데, 여기서 왕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다. 예수님이 지상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신 것만 강조되고 입성사실을 부각시키지 아니한 이유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시다. 하늘의 왕이시지 땅의 왕이 아니시다. 영적인 왕이시지 문자적인 왕이 아니시다. 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부른 찬양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3-14)였는데,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의 온 무리가” 부른 찬양은 “하늘에는 평화요”(37-38절)였다. 땅의 평화가 아니라, 하늘의 평화를 노래하였다. 하늘 예루살렘이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평화를 누릴 자들이다. 그들은 땅에서의 평화를 넘어 하늘에서의 평화를 바라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셔서 성을 보시고 우셨다(41절).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참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이름뿐인 ‘평화의 도시’ 즉 평화가 없고 평화를 모르는 도시였다. 이 성민들은 몇 날이 못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자들이었다. 그 대가가 파멸이었기 때문에 안타가워서 우셨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주후 70년 유대-로마전쟁의 패배로 철저히 붕괴되었고, 이후 유대인들은 1878년간 모국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이 자랑하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선량한 사람을 잡아 죽일 방도나 찾는 강도의 소굴이었기 때문이다(41-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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