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01]평화의 복음(눅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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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01]평화의 복음(눅 2:14)
누가(Luke)
누가는 안디옥 출신의 의사로 여겨진다. 니케아(터키의 이즈니크) 공의회가 개최된 325년경에 <교회사(III.4)>를 쓴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와 405년에 라틴어개역 불가타를 완성시킨 제롬은 누가를 안디옥 출신의 의사로 간주하였다. 누가는 바울의 제2차 그리스 선교 때부터 바울과 동고동락했던 선교사였다. 바울은 누가를 “사랑을 받는 의사”(골 4:14)로 불렀고, 끝까지 자기와 함께한 동역자로 불렀다(딤후 4:11).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은 데오빌로로 불린 특정인에게 헌정되었다. 데오빌로는 누가의 후원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데오빌로(Theophilus)란 이름은 하나님을 뜻하는 ‘Theos'와 친구 혹은 사랑을 뜻하는 ’Philos'의 합성어로써 ‘하나님의 친구’ 혹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란 뜻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누가로부터 두 권의 책을 헌정 받은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의 대표로 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위한 후원자들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74세 혹은 84세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터키에 있는 고대도시 에베소에 누가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있다. 그곳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에 의하면, 그곳은 본래 로마시대에 유명한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던 신전이었으나 비잔틴시대에 이르러 예배처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392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부상하면서 그리스-로마의 신전들이 폐쇄되었고, 그 일부가 기독교예배당으로 쓰이게 되었다. 유대교 성막과 성전의 입구는 처음부터 동쪽에 있었고, 이 전통을 따라 기독교예배당의 입구도 본래 동쪽에 두었으나 입구가 서쪽에 있었던 이방신전들을 예배당으로 씀으로써 출입구가 서쪽에 놓인 예배당들이 생기게 되었다.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우드(T. J. Wood)가 고대의 음악당인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 길에 이곳에서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소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게 되었고 누가의 무덤으로 확신하였다. 소는 누가와 누가복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소는 평화의 상징이다. 소는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평화로움의 대명사이다. 조선시대의 화가들은 목동이 소를 타고 앉아 피리를 불거나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평화롭게 누워 있는 모습으로 도가적(道歌的)인 이상세계를 표현하곤 하였다. 마찬가지로 중세시대의 유럽화가들 역시 목가적(牧歌的)인 아르카디아를 이상세계로 묘사하였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평화의 복음을 소개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점에서 누가복음서의 상징성을 소로 표현한 것은 적절했다고 보인다. 누가는 마가와 마태보다 더 자주 ‘평화,’ ‘화평,’ ‘평강’ 혹은 ‘평안’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한글 단어들은 모두 영어 ‘peace’에 해당된다.
누가신학의 특징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류의 복음, 평화의 복음, 승리(영광)의 복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 2장 14절과 19장 38절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실현하실 내용으로 평화와 영광을 언급하였다. 평화와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누릴 구원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들은 이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19장 38절에서처럼, 저 천국이 주는 것들이다.
인류의 복음(Gospel for Universe)
누가는 인류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누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온 인류이다.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2:32)이시고, 그분의 복음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2:10)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에게만 미치는 특별한 선택이 아니다. 이방인에게까지 활짝 열린 그래서 누구나 차별이 없이 믿음으로 은혜를 입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선민’이란 더 이상 혈통과 혈연에 좌우되는 특정한 민족을 뜻하지 않고, 혈통이나 민족에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 공동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색깔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빈자와 부자의 차별이 없고, 주변부와 중심부에 상관없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참여할 수 있다. 누가가 복음서에서 사마리아인, 이방인, 여자, 어린이, 가난한 자, 멸시받는 자, 병든 자,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어린 선교에 집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복음에 다른 복음서에 없는 선교비유가 무려 14개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을 도와 이방인 선교에 헌신했던 누가는 복음서에서 소외계층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가를 피력하였다. 누가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글을 쓴 사람이다. 유대인들의 배타적 민족적 희망(Ha-Tikvah)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지 않고, 주변부 이웃들인 열방민족들의 보편적 희망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접근하였다. 따라서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이방인인 데오빌로에게 헌정하였고(1:1-4), 예수님의 조상을 유대민족의 뿌리인 아브라함을 뛰어넘어 인류의 뿌리인 아담에게까지 추적했으며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다”고 하였다(3:23-37). 또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렙다의 한 과부와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처럼, 이방인들이 새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4:16-27), 사마리아인들과(10:30-37, 17:11-19) 여성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소개하였다(8:1-3, 10:38-42, 18:1-7, 21:1-4, 23:27-31, 24:1,10).
이런 맥락에서 주후 26년부터 30년까지 3년 6개월 동안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던 역사적 삶의 자리와 유대민족의 정치경제적 희망만을 성경해석의 실마리로 보려는 사회과학적 성경비평방법은 정치적 목적에 매몰된 성경비평방법이다. 그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에서 오랫동안 억눌려 살아온 유대민족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자리에서만 복음서를 읽으려는 것이므로 문자적인 역사 정치 경제 사회의 틀을 뛰어넘어 훨씬 높은 차원의 영적세계로 나아간 바울과 누가의 세계선교의 비전을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것은 복음서를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 현실의 개혁이나 혁명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삼음이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목적으로 삼음이 아니다. 이 문제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격하게 펼친 논쟁의 핵심이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자료들을 어떻게 선별하고 편집하여 해석했는가는 그 시대의 삶의 자리를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들이 써낸 복음서들의 내용이 기독교의 내용이요, 기독교가 세워진 기초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복음(Gospel for Peace)
누가의 복음서 기록 목적은 매우 다양하다.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고, 종말을 현재화 또는 역사화 시키려는 신학적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복음의 대상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 즉 온 인류에게로 확대시킨 것과 그 목적을 위해서 출범된 신약교회시대가 성령시대요, 하나님께는 영광(glory to God)과 사람에게는 평화(peace to men)가 확장되어지는 은혜시대 즉 미래종말의 희망과 지복이 지금 여기 역사현장에서 이미 시작된 것을 설명하려한데 있다.
누가의 높은 영성은 유대민족의 오랜 희망의 실현과 유대교와 유대민족사의 틀 속에 예수님의 사건들과 말씀들을 가두지 않고 더 넓은 이방세계를 향해 평화의 복음으로 지평을 넓힌데 있다. 우리가 봐야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은 로마인들의 귀에는 반역행위에 가까웠다. 로마제국의 명예와 합법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은 로마가 피스메이커(peacemaker)란 것이었다. 로마는 신성의 지배자 로마황제의 후원 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神)이라고 주장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공식 칭호들 가운데 하나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였다. 로마군대는 이 평화를 이루고 보장하는 집단으로서 속주민들은 이를 고맙게 여기고 기꺼이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는 전쟁과 죽임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평화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pax)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shalom)이었다. 이 샬롬은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교수의 말대로,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였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얻어진 평화였다.
누가가 복음서에서 강조한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최후승리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승리의 복음(Gospel for Triumph)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승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시고, 천상천하의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께서 친히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걷게 될 것을 암시하였다. 이를 위해서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가 배척당하여 죽음의 언덕에 오른 십자가의 길이었으나 기도와 성령 충만함으로 걸었던 승리와 영광의 길이었음을 피력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공생애 처음부터 고향사람들로부터, 사마리아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당하셨다는 점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점과 이 험한 길을 항상 기도하시면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극복하셨다는 점을 크게 강조하였다. 누가는 고난의 행진을 해야 하는 또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하는 신앙의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님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성령 충만의 조건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조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배척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함과 쉬지 않는 기도로써 천성을 향한 행진을 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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