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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08]호모 비아토르의 험난한 노정(눅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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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767 2012.08.31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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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08]호모 비아토르의 험난한 노정(눅 4:1-13)

호모 비아토르가 마귀를 이기는 힘

누가복음 4장 1-13절에서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의 길이 가시밭길, 배척의 길, 십자가의 길이 될 것에 대한 예방주사이다.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험난한 고난의 길이 될 것을 예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 임직하신 후의 첫 사건이 마귀의 시험이다. 이 사건이 고향 나사렛사람들에게 당하신 배척사건에로 바로 이어진다. 누가가 이 사건들을 예수님의 공생애 첫 사건으로 배치한 이유는 마귀의 저항을 암시하려한 것이고, 마귀의 저항은 고향 나사렛사람들한테서 시작되고 사마리아인들과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에게로 이어져 예수님이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13절에서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났다"의 뜻).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 마가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고, 사십 일간 광야에 머물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며,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으나 천사들이 시중들었다(막 1:12-13)고 간략하게 적었다. 금식하셨다는 말과 시험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마태는 예수님이 성령님께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신 후에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으나 물리치셨다고 적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사십 일간 성령님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사십일 간 금식하신 후에 세 가지 시험을 또 받으셨다고 적었다. 누가의 보도가 다른 두 저자들의 것과 특별히 다른 점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란 문구의 추가와 시험 직후에 마귀가 잠시 동안 떠났다고 소개한 점이다. 마귀의 시험은 사십 일 금식기간 중에도 있었고, 금식 후에도 있었으며, 일단 목표물을 정하면, 몇 번 정도 실패해도 잠시 동안만 물러설 뿐이지, 괴멸시킬 때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누가가 3장 21-22절에서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는 체험, 성령님이 강림하시는 체험, 하늘의 소리를 듣는 체험을 하셨다면서 “기도하실 때”를 강조한 것이나 4장 1-3절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님에게 이끌리신” 때문이었다고 강조한 이유가 마귀의 저항을 전제로 한 말씀이다. 마귀의 저항을 물리치고 이길 힘은 기도와 성령 충만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가 마귀의 시험을 소개한 목적은 마태가 소개한 목적과 다르다. 마태복음에서 마귀의 시험내용이 유대인들의 정치경제적인 요구에 상응한 것이었다면, 누가복음에서 마귀의 시험은 성도들이 천로역정에서 겪는 마귀의 유혹들에 상응한 것이다. (마귀의 유혹은 본능의 유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서 그리스도인은 멸망의 도시를 빠져 나와 왕의 길(King's Way)을 걷는다. 하지만 그 길은 험한 가시밭길이다. 그래서 마귀는 쉽고 편한 길로 유혹한다. 마귀가 권하는 길로 들어서면, ‘의심의 성’에 사는 ‘절망’이란 거인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란 동료가 곁을 지킨다. 또 ‘약속’이란 마스터키가 그의 품에 있어서 절망을 극복하고 의심의 성을 탈출하게 만든다. 여기서 희망이란 동료는 성령님이요, 약속이란 마스터키는 기도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와 성령 충만은 천로역정을 마치게 하는 능력이요, 안전장치이다. (이스라엘에는 실제로 '킹스 하이웨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성에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호모 비아토르가 영웅이 되는 힘

우리가 비록 헤라클레스나 이아손, 테세우스와 같은 영웅은 못되어도 험한 인생길을 헤쳐 나가는 모험을 즐긴다면 우리도 분명 영웅이다. 신화에서 신의 아들들로 태어난 자들이 모두 영웅인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우리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손에 창과 방패를 들고 있어도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 않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항구에 머물며 바다로 나가지 않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거친 파도와 폭풍과 싸우지 않는 이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가시밭길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이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높은 산 험한 길을 오르지 않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 달궈지고 녹아지고 제련되어 나오지 않으면 영웅(정금)이 아니다. 미궁에 빠져보지 않은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는 말이 있다. 이 고통을 이기는 호모 비아토르(떠도는 인간)가 영웅이 된다. 그래서 영웅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가 싸운다. 영웅은 거친 바다에 배를 띄우고 돛을 올린다. 영웅은 높고 험한 가시밭길 산을 오른다. 영웅은 미궁에도 빠지고 하늘도 날고 지옥에도 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도 안전장치(예: 번지점프, 빙벽타기, 암벽타기)는 항상 있다.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안전장치가 영웅을 낳게 하는 이유가 된다. 헤라클레스에게는 방망이가 있었고, 포세이돈에게는 삼지창, 아폴론에게는 백발백중하는 활이 그리고 아킬레우스에게는 방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가진 무기 즉 타고난 재능이 그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천하의 영웅호걸이라도 아무런 도움 없이 맞닥뜨린 난관을 헤쳐 간 것은 아니다. 헤라클레스에게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이 있었고, 테세우스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으며, 벨레로폰에게는 아테나 신의 황금고삐가 있었고, 이아손에게는 헤라 신의 도움과 메데이아의 마법이 있었다.

이들 영웅들이 괴물들을 물리친 것은 자신의 재능이나 손에 쥔 막강한 무기 때문이 아니었다. 헤라클레스가 네메아의 사자, 레르네의 물뱀 히드라,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물리친 것은 활과 창과 방망이 때문이 아니다. 그의 승리의 배경에는 항상 지혜의 신 아테나가 있었다. 영웅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타래를 입구 기둥에 붙들어 매고 철저하게 그 실에 의존했기 때문에 괴물을 물리치고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벨레로폰이 천마(天馬)인 페가수스를 잡아타고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지혜의 신 아테나가 황금고삐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아손이 황금모피를 손에 넣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헤라 신과 메데이아의 마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영웅은 없다. 영웅이 과업을 완수하는데 절대적인 것은 신의 도움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영웅은 일의 성패가 신의 도움이 있고 없음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리석은 영웅은 일의 성패가 자신의 능력에 있다는 오만에 빠진다. 그러나 오만은 영웅을 쓰러뜨리는 아킬레우스 건(腱)이다. 영웅은 남에게 패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내부의 적인 오만 또는 자기우상 때문에 고목처럼 무너진다.

호모 비아토르가 걷는 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7)을 쓴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은 영웅은 초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혹은 바울처럼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말하였다. 그는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의 특징이 1)모험을 떠난다는 점, 2)모험 중에 큰 난관에 직면한다는 점, 3)난관을 극복하고 승리한다는 점, 그리고 4)이웃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어서 돌아온다는 점이라고 말하였다.

조셉 캠벨에 따르면, 영웅은 평온한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과감히 뛰어든다. 영웅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지만 불굴의 용기와 의지로 극복한다. 그리고 영웅은 과거보다는 훨씬 새롭고 좋은 그 무엇인가를 사회에로 가져온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영웅이시다).

영웅은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혹은 바울처럼 신의 부름(소명)을 받고 ‘호모 비아토르’ 즉 모험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모험 즉 길 떠나는 것을 거부하면 영웅이 될 수 없다. 이때 영웅이 모험에 뛰어드는 것을 기존세계에서 벗어나 신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문을 지키고 있는 자가 영웅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출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도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고 나서야 인생행로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관문 앞에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고 통과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문에 들어서면 영웅은 자신의 한계를 철저하게 깨닫고 성찰하게 된다. 이것을 영웅의 각성이라고 하는데, 이 자기부족에의 각성이 영웅의 길을 가는 첫걸음이 된다. 소명을 받고 모험을 떠나 얻게 되는 깨달음은 번데기에서 벗어나 나비가 되는 과정이다. 나비가 되면 이상을 찾아서 훨훨 날아가 이상을 얻기까지 싸운다. 이때의 싸움은 매우 고독한 투쟁이다. 그래서 영웅은 고독하다. 기존의 틀도 버려야 되고, 기존의 행동습관도 버려야 한다. 나비가 자기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어버리듯이 자기를 보호했던 기존 세계와 단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독한 것이다. 그리고 영웅은 성공을 거둔 후에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과정은 영웅에게 또 다른 시련이지만, 그의 귀환은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은 축복이 될 것이다).

영웅이 되고 못되는 차이는 결단에 달려 있다. 익숙한 기존의 삶의 방식에 안주하여 안락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항구를 떠나 험한 바다로 모험을 떠나 환희와 자기 성장을 맛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는 없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린다면, 또 모험에서 자기 변화에 성공한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영웅이 천개의 얼굴을 갖는 이유가 된다.

영웅 중에는 예수님처럼 순교자가 되어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 영웅이 있는가 하면, 폭군으로 변하여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영웅도 있다. 조셉 캠벨은 “어제의 영웅이 오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면 내일은 폭군이 된다.”고 하였다. 오만이란 자기우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오만에 빠진 자치고 패가망신하지 아니한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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