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주일설교 KCCS Digital Archive

[눅강09]예수님의 공생애노정(눅 4:14-30)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12,898 2012.09.01 18:38

본문

[눅강09]예수님의 공생애노정(눅 4:14-30)

샘플이 된 예수님의 노정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중요한 테마는 그 주체가 성령님이시란 것이다. 일군이 많고 각기 다른 지역들에서 맡은 일을 하고 있다할지라도,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분은 한분 성령님이시다. 예수님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고 관여하신 성령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그분의 제자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관여하신다. 예수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게 하신 성령님은 그분의 제자들의 삶속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

제주도에 올레 길이 23개 정도 있다. 모든 길에는 출발지와 종착지가 있다. 만일 제주도 땅을 한 날에 다 밟기를 원한다면, 23명이나 혹은 23개의 탐방 팀이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각기 다른 코스를 선택하여 땅 밟기를 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갈릴리를 출발하시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땅 밟기를 하셨다. 예수님의 이 공생애노정은 기독교가 자랑하는 제1코스 또는 첫 번째 길이다. 이 코스의 백미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곧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십자가의 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길을 밟아보기를 원할 것이다.

누가의 생각은 이렇다. 비록 장소나 시간이 다를지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밟는 그 길들은 모두 제1-1코스 혹은 제1-2코스 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코스의 이름을 제2코스 혹은 제3코스라고 하지 않고, 제1코스만 고집하는 이유는 모든 코스가 다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제1코스는 십자가의 길을 말한다. 지난 2천 년간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밟아온 코스들은 모두 십자가의 길이었다. 예수님이 밟았던 십자가의 길은 골고다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의 길, 바울의 길, 바나바의 길, 누가의 길 등으로 계속 이어져 나간다.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에 이어 제자들의 선교노정이 이어져 나가고,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노정이 이어져 나간다.

이 노정들 속에 동일한 하나님의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이 누가의 확신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누가복음에서의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은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의 선교노정에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제한되었지만, 팔레스타인 밖에서 이뤄진 바울의 선교노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누가의 입장이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배척을 당하셨듯이, 디아스포라 출신의 바울도 동족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들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배척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은 그분의 모든 제자들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밟아야할 구원의 길이요, 샘플이며, 모범적인 길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 4장 14-44절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맞물려 있다. 누가는 바울의 오랜 동역자였다. 그가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설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와 그가 동족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고난과 배척들이 이미 수십 년 전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설교와 고향사람들로부터 고난과 배척을 당하신 사건 속에 예시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의 예리한 판단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님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이고, 바울이 밟았던 노정은 예수님이 걷고 쟁취하셨던 승리와 영광의 길이었던 것이다.

배척당하신 예수님의 노정

바울과 함께 이방인 선교에 헌신했던 누가의 관심은 이방인 구원사역의 당위성이 바울의 신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에 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확고한 신념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데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 데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 신분 색깔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값을 쳐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뿐이라는 것이었다. 누가는 나사렛회당에서의 사건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는다는 바울의 신념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나사렛 회당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17-19절, 즉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의미를 해설하셨을 때만 해도 목수의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23-27절의 말씀을 이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굉장한 반전이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께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의 혜택을 과연 누가 받을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때문이었다.

레위기 25장 8-12절과 신명기 15장 1-5절에 나오는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란 과격한 개혁 또는 총체적인 경제적 재분배를 말한다. 종들은 자유를 얻고, 모든 부채와 채무는 탕감되며, 저당 잡힌 토지는 본래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경작지는 일 년간 쉬게 하는 제도이다.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갖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겨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갖지 못한 자들에게 50년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희년제도는 성경에나 있는 이상(理想)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실천되지 못한 죽은 제도였다. 그리고 가진 자들은 그것이 실행되지 않고 이상으로만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수의 아들인 주제에 무슨 권한으로 희년을 선포한단 말인가? 대제사장만이 할 수 권한인데, 자기가 누구기에 이런 혁명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향해서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쪼들리던 사람들, 자기 땅이 없는 농사꾼들, 노예와 같이 갖지 못한 자들은 희년을 실시하면 크게 혜택을 누릴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한 희년의 축복을 맞이할 자들이 유대인들이 아니고, 사렙다의 과부나 시리아의 나아만과 같이 믿음을 지닌 이방인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데 있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대로, 갖지 못한 자들은 갖지 못한 자들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가 치솟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취지는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를 맞이할 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는 자들이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주장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상속권이 토라율법을 엄수하고 할례를 행하는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인들로서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고 그들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시고 박해받으신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성령님이 이끄신 예수님의 노정

누가복음 4장은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1절)란 말로 시작되고 있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14절)로 시작되고 있다. 이 두 구절에서 확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노정의 첫발을 내딛으실 때부터 성령님의 충만함, 성령님의 이끄심 혹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점이다. 4장 1절에서 예수님은 유대광야에 계실 때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님에게 이끌리셨고, 14절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노정을 밟으실 때 성령님의 능력으로 시작하셨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래서 그분의 노정을 따라 우리 자신의 노정을 밟아간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우리가 우리만의 힘과 지혜만으로 이 길을 완주할 수 있겠는가? 신성을 타고나신 예수님조차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했고, 성령님의 충만함과 성령님의 이끄심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힘겹게 완주한 그 길을 육신이 연약한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성령님의 도우심도 없이 완주할 수 있겠는가?

누가가 전한 강력한 메시지는 이 시대가 성령님의 시대라는 것이다. 성령님에 의해서 교회시대가 도래했고, 성령님에 의해서 은혜시대가 도래했고, 성령님에 의해서 구원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신약성경을 쓴 다른 어떤 저자보다도 ‘성령’과 ‘성령 충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성령님에 관한 단어가 마태복음에 17회, 마가복음에 23회, 요한복음에 21회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38회나 나온다. 사도행전에 쓰인 69회까지 합하면 무려 107회나 된다. 그만큼 누가는 성령님의 충만함을 많이 강조하였다. 성령님의 충만함과 성령님의 이끄심과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해야만 중도에서 낙오되지 않고 천로역정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성령님이 이끈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을 성도들에게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예수님의 3년 6개월 공생애노정을 지탱시킨 원동력은 끊임없는 기도, 성령님의 충만함, 성령님의 이끄심, 성령님의 능력이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성령님의 도우심과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호모 비아토르’(나그네)의 험난한 삶, ‘비아 돌로로사’의 골고다의 길을 완주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성령님은 산소처럼 우리들의 영혼에 소중한 분이시다.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고, 구원을 보증하시며, 인(印)치시고, 하늘 가나안땅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성령님은 굴절의 빛처럼 우리 가운데 따스하게 내재하시며, 의사처럼 영혼의 병을 고쳐 주시고, 변호사처럼 억울한 일을 도우시며, 상담자처럼 연약함을 도우시고, 교사처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중생의 기쁨을 얻게 되며, 시련을 극복하고, 천국의 축복을 미리 맛보며 체험하게 된다. 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막연히 주의 재림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계신 세상으로 바꿔감으로써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사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