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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7]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 파송(눅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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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985 2012.11.28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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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7]예수님의 평화군(平和軍) 파송(눅 9:1-9)

파송의 목적

누가복음은 총4부로 되어 있다. 1-3장은 서론부분이고, 4장부터 9장 50절까지는 이스라엘 북부지역 갈릴리에서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다. 갈릴리지역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이 생명 살리는 일이 역사 속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제자들을 불러 평화군을 조직하시고 훈련하신 일이었다. 평화군의 임무는 빈 배처럼 외롭고 흔들리고 배고프고 병들고 지친 이들에게 희년을 선포하고 만선(滿船)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9장 51절부터 19장 44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신 이야기이다. 이 오름(aliyah)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전체 24장 가운데 차지하는 분량은 무려 10장, 42퍼센트이다. 이 오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길이 고난의 길이요, 가시밭길이며,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처럼, 제자들의 길도 고난의 길이요, 가시밭길이며, 십자가의 길이 될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영광의 길이 되고 승리의 길이 될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이것이 9장에서 제자들의 파송과 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의 행진이 동시에 시작되는 이유이며, 10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던 중에 70명의 제자들을 불러 따로 세우시고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시는 이유이다. 나머지 19장 45절부터 24장까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한 주간의 행적이다.

누가복음 9장 1-6절의 파송은 6장의 평화군의 조직과 강령, 7장의 임무, 8장의 훈련에 이은 실습이다. 여기서 파송 받은 제자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이다. 하늘 예루살렘에로 오름의 행진을 시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파송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희년을 선포하고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다. 1-2절의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셨다”는 말씀에 파송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누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샬롬 즉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하셨다고 보았다. 이 하나님나라운동이 성령의 충만함과 기도로 무장한 평화군의 활동으로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고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고 평화군을 조직하시고 강령을 선포하시며, 임무를 부여하시고 세상 속으로 내보내셨다.

7-9절은 갈릴리지방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이 하나님나라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을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헤롯 안디바는 세상나라와 세상의 일 즉 돈과 명예와 권세를 좇는 사람들의 대표이다. 헤롯 안디바는 먹고 입고 쓸 것이 풍족한 왕이었지만, 하나님나라운동이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까봐 당황스러워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고 입고 쓸 것이 부족한 떠돌이 전도자들이었지만, 가진 것에 자족하면서 하나님나라운동에 힘쓴 것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나라운동을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평화군을 조직하시고 그들에게 능력과 권위로 덧입히시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생명을 구하도록 세상으로 보내셨다.

파송의 긴박성

예수님은 3절에서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 대신 1절에서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그리고 6절에서 제자들의 행적을 보면,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또는 복음의 일과 세상의 일을 명확하게 선을 구어 구분 지으셨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먹지도 말고 입지도 말며 쓰지도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이다.

이것은 일의 우선순위, 희년선포의 긴박성, 복음전도의 절박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가지지 말며”는 당장 가되, 지팡이, 배낭, 빵, 돈 또는 여벌옷을 챙기기 위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것, 지금 모습 그대로 신속히 가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행 중에 필요한 것들은 평화의 복음을 수용한 자들로부터 공급될 것이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전도자는 짐을 가볍게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비울 때 그 비워진 공간을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무소유는 공급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크게 의존도를 높이는 장점이 있다. 세속적으로 보면 바보 같은 행동일지모르지만, 영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행동이다.

제자들 또는 전도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입은 자가 전도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공급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위해 철저한 준비가 불필요했을 수 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의 준비가 불필요했을 수 있다. 누가복음이 쓰이고 20-30여년이 지난 주후 100여년 경에 시리아의 한 시골 교회에서 쓰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떠돌이 사도들과 예언자들 접대 문제(11장 3-12절)와 붙박이 예언자들과 교사들 공양(13장)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떠돌이 목회자는 하루나 길어도 이틀까지만 머물러야 하며,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를 거짓 목회자로 봐야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떠날 때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하며,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를 거짓 목회자로 봐야한다고 되어 있다. 반면에 성도들은 붙박이 목회자를 위해서 모든 수확의 맏물을 목회자에게 줘야하며, 만일 교회에 목회자가 없으면, 가난한 자에게 줘야 한다고 되어 있다. 맏물은 거둔 자가 소유주가 아니라 목회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의 것임을 밝힌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일에도 돈은 필수항목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세상의 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일이 성령 충만함과 기도로써 이뤄진다는 것이고,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며, 만선의 기쁨을 준다는 데 있다.

파송의 연속성

누가복음 9장 4-6절은 앞서 8장에서 살펴본 대로 배척과 영접에 관한 말씀과 행위들의 연장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큰 권능을 가지셨더라도, 예수님이 아무리 큰 권능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셨더라도, 믿음으로 수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하는 희년선포활동은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져야할 활동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항상 배척과 수용으로 갈렸다. 8장에서 보았듯이 선포된 메시지를 입증할만한 놀랍도록 큰 능력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배척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병존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씨가 뿌려진 네 종류의 땅에서도 이미 설명되어졌다. 씨를 받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들이 있고, 씨를 받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이 있듯이, 선포된 메시지를 입증할 큰 기적을 보고서도 믿음을 갖지 못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믿음이 있어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질병을 치유 받고 평화를 누린 사람들이 있었다. 제자들의 활동에도 그와 같은 반응들이 있을 것을 명심토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선포된 희년의 소식을 수용한 자들의 것이 될 것이고, 그들의 삶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희년의 복이 누려지며, 만선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또 그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헌신적 후원으로 6절의 말씀처럼,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는 사역이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은 온 세상에 넘치게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지방 사람들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습관이 있었다. 건조한 기후와 비포장 도로 때문에 옷이나 신발에 많은 먼지가 내려앉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으로는 부정한 것들을 집안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교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과 정한 것으로 나눌 뿐 아니라,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밖에서 흙먼지를 발로 밟은 순간부터 부정한 것을 멀리하기란 불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있다가 집안에 들어올 때나 이방인 지역을 통과하여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올 때는 먼지를 떨어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5절의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관행 이상의 것, 즉 제자들을 깊이 배려하신데서 나온 말씀으로써 희년의 선포를 수용하지 않거나 평화의 복음을 거부하는 배척하는 자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나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뜻일 수 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아니한 책임이 전도자에게 있지 않고, 배척자에게 있으므로 푸대접받은 일로 인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 수 있다. 또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는 행위는 복음을 거부하는 악한 세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권면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살후 3:13).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고(갈 6:9), 종국에는 그것이 “영광”(엡 3:13)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최후는 영광이란 것이 누가의 핵심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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