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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28]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5(눅 12: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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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737 2013.02.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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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28]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위한 무장5(눅 12:13-59)

재물의 나눔

누가복음 12장 13-21절의 부자비유는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경고이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목숨이고, 목숨보다 귀한 것은 영생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에서 쌓아두는 행위는 습관적인 행위와 집착을 뜻한다. “자기를 위하여”란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타인(밖)이 아니라 자기(안)란 뜻이다. 자기와 재물에 집착하는 만큼 정직한 방법만을 고집했을 리 없고, 하늘에 재물을 쌓겠다는 생각이 없는 만큼 나눔을 고민해봤을 리가 없다. 결국 부자의 문제는 재물의 많음에 있지 않고, 탐심의 많음에 있다. 재물은 죄가 아니지만, 탐심은 죄이다. 재물의 많음은 죄가 되지 않지만, 탐심의 많음은 죄가 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란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리고 “부요하지 못한 자”란 그 방향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눈과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 것에 동일한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관심과 눈은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할 수 있는가? 그 해답이 22-34절의 말씀이다. 첫째는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절)는 것이고, 둘째는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31절)는 것이며, 셋째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33절)는 것이다. 이것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중요치 않다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먹고 입는데 지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그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정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정의와 사랑을 구하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 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구한다면, 넘침도 없고 부족함도 없을 것이다.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마시겠다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한다면, 공중의 까마귀처럼, 들의 백합화처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닳지 않는 지갑과 같고, 고갈되지 않는 하늘에 있는 보물과 같아서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가 최후의 식량인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을 가지고 엘리야를 위해 빵을 구웠을 때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한“(왕상 17:12-14) 것과 같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타인과 나눴을 때 수천 명이 먹고도 남은 것(막 6:41-44)과 같아서 정의와 사랑이 넘친다면 먹고 입고 마시는 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랑의 나눔

레오 톨스토이(1828-1910)의 마음속엔 세 가지 물음이 있었다. 첫째,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는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민화를 통해서 발표했다. 놀랍게도 그는, 천성이 착하고 긍정적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님조차도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셨는데, 가난하고 모질며 거칠고 욱하는 성질의 사람의 마음속에조차 사랑이란 평화의 씨앗이 심겨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사람에겐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과 세 번째 해답으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주인공 미하일은 인간의 목숨을 거둬드리는 저승사자였다. 그는 자신의 일을 동정심에 이끌려 늦장 처리함으로써, 톨스토이의 마음속 세 가지 물음에 해답을 찾아야 하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과제를 안고, 지상으로 쫓겨난 날개 꺾인 천사였다. 그러나 그의 과제는 의외로 쉽게 풀려나갔다.

미하일은 헐벗고 배고파 추위에 떨고 있는 자신을 극한 가난과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거둬주고 일을 시켜준 구두장이 세몬 부부에게서 사람의 마음에는 근원적으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부유한 신사에게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아니한 것이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부유한 신사는 가져온 값비싼 가죽을 내려놓으면서, 자신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게 될 것을 모른 채, 1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을 튼튼한 가죽부츠를 만들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미하일은 그를 위해 부츠대신 장례용 슬리퍼를 만들었고, 부자의 하인은 가던 길을 돌아와 주인이 죽었다며 부츠대신에 장례용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부인이 쌍둥이 소녀들을 데리고 구두 가게를 찾아왔을 때, 미하일은 그 아이들이 바로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목숨을 빼앗지 못했고, 그 일로 인해서 벌을 받아 인간세상으로 추락했으며,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수일 후 핏덩어리 쌍둥이를 낳기만 하고 돌보지 못한 채 유명(幽明)을 달리했던 그 가여운 여인의 아이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고아소녀들은 이웃 아주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반듯하게 자라 벌써 6살이 되었던 것이다. 미하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산다는 마지막 해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과 레오 톨스토이는 인간의 가장 큰 실수가 자신을 향하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만이 사는 길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지, 의식주문제나 생사문제를 염려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염려하며 살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고 자기만을 바라보고, 자기 가족, 자기 부족, 자기 민족만을 바라보는 탐심 때문에 죽임의 일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적정보의 나눔

누가복음 12장 49절과 51절에서 예수님은 “불을 땅에 던지려고” 또 “분쟁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52-53절에서는 이 분쟁이 가족까지 갈라놓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땅에 평화를 주시려고 강림하신 예수님께서 불과 분쟁을 언급하시고, 54-59절에서 시대를 분간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빚쟁이와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경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누가복음의 주제는 평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2:14)요,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화이다. 참 평화에 반대되는 것이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 평화를 식별하고 몰아내는 싸움이 있어야 한다. 불의를 제거하기 위한 분쟁이 수반되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분쟁을 시작해야할 시기이요, 결단해야할 시기이며, 선하고 악함과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할 시기이다.

49절의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이미 붙었으면, 예수님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고통과 죽음의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마귀의 저항과 배척과 정신적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고의 시간은 회개를 위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화해하기를 힘써야”한다. “화해하기”는 “놓이기”(aphallasso)를 뜻한다. 빚을 진 자는 빚쟁이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감옥에 가기 전에 빚을 청산해야한다는 뜻이다. 빚을 진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다. 채무자가 상황파악을 잘 해서 채권자에게 고소당하지 않도록 해야 감옥에 들어가지 않듯이,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롬 5:1) 심판을 면할 수 있다.

누가는 사랑과 선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보였다. 마태는 다가올 세상 ‘올람하바’(Olam Ha-Ba) 또는 고토회복을 희망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이 유한하고 불안한 이 지상 가나안땅이 아니고, 영원하고 안전한 저 하늘 가나안땅임을 깨우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종말과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들에 집중하였지만, 누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눅 2:14)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사랑과 선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5-59절에 종말과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배치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저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시험하였고, 종국에는 정치종교지도자들과 제자 중 가룟 유다에게 역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고 동굴무덤에 가두고 인봉까지 시켰다. 동일한 마귀는 지금까지도 성도에게 역사하여 하늘 예루살렘에로의 오름을 저지하고 시험한다. 그러므로 쉼 없는 기도와 성령 충만함과 말씀과 믿음으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던 예수님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45-51절)와 불을 던지러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49-53절)와 시대를 분간하고 화해하기를 힘쓰라(54-59절)고 교훈하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기도와 성령 충만, 믿음과 나눔으로 무장하고 마귀의 기습과 시험에 대비하여 항상 깨어서 선악을 구별할 것과 지금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의 나라가 이룩될 시기임을 분간하여 심판을 대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영적정보를 이웃들에게 전해서 공유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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