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32]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2(눅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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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2]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2(눅 15:1-10)
하나님의 심정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선교비유가 있다. 이들 비유에는 양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 은전을 소중히 여기는 여인의 심정,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겨있다. 여기서 양, 은전, 아들은 모두 잃었다가 찾은 것들이다. 그리고 목자, 여인, 아버지는 잃은 것을 찾는 삼위 하나님을 상징한다. 목자는 예수님, 여인은 성령님,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한 것이다.
누가의 관심은 소외된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교사역에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은 누가의 관심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다. 본장에는 죄인의 회개와 구원의 필요성이 피력되어 있다. 1절에 등장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와 구원이 필요한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해당되는 잃은 자들이다. 2절에 등장하는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회개와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왜곡된 하나님이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던 자들이다. 이 두 그룹의 대조는 세 번째 비유인 탕자를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 탕자와 순종적인 맏아들에서, 또 18장 9-14절의 두 사람의 기도비유에 등장하는 세리와 바리세인,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세리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은”(apollymi, 아폴뤼미)이란 단어가 8번(4, 6, 8, 9, 17, 24, 32절) 나온다. 그 가운데 6번이 “찾은”(heure, 휴레)과 함께 대조되어 쓰였다. 또 15장에는 각 비유에 소유를 나타내는 “있는데”(ekon, 에콘)란 단어가 4, 8, 11절에 나온다. 이 말은 주인이 소유했던 것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된 기쁨을 보여주기 위해 쓰였다. 그리고 “잃은”은 “죽은” 상태를 말한다. 24절과 32절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가 이것을 잘 설명해준다. 1절에 등장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임을 말한다.
누가복음 15장의 양, 드라크마, 아들은 주인의 소유물이다. 고대근동이나 그리스 로마시대에 자녀는 아버지의 소유물이자 재산이었다. 주인이 자기 소유물을 잃었다가 찾고 큰 기쁨을 누렸다. 예수님은 이들 비유를 통해서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란 점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란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잃어버린 자들이지, 버림받은 자들이 아니란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당신의 곁을 떠난 자들을 기다리신다.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방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의 범주와 둘째 아들 탕자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도 아니다. 맏아들, 즉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유대인들만을 택하시고 이방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색깔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잃은 자들을 찾고 계신다. 버림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의의 새 옷을 입히시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기시고(엡 6:15) 상속자의 증표로 손에 가락지를 끼어 주시며 천국잔치를 베풀어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신다.
목자(예수님)의 심정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온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온 집나간 탕자의 모습과 겹치고, 2절에서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고 비방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돌아온 동생을 환대한 아버지께 불만을 털어놓은 순종적인 맏아들과 겹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613개 계명들을 무의식중에 어기는 것을 막기 위해 랍비들이 만든 율법들(Gezeiroth) 가운데 음식법과 그릇 씻기법이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율법들을 철저하게 지켰지만, 세리들, 죄인들, 이방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淨)하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세리들, 죄인들, 이방인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음식법과 그릇 씻기법을 철저히 지킨 자신들의 집에서 세리들, 죄인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조차 부정(不淨)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淨)하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한 세리들, 죄인들,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섞이는 것조차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다고 비난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외식보다는 본질에 치중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이 사랑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아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613개 계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울타리 율법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독점하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가두는 행위였다. 민족, 성별, 신분, 계급에 따라 울타리를 정하고 하나님을 지성소에 가둔 예루살렘성전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구중궁궐이나 다름없었고, 유일하게 지성소 출입이 허가된 대제사장이야말로 지존(至尊)이었다.
세리들, 죄인들, 이방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나눈 예수님은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 하나님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간절하게 찾으시는 분이시다.
3-7절의 잃은 양의 비유에서 ‘잃은 양’은 소외된 자들의 대표이다. 세리들, 죄인들, 이방인들의 상징이다. 자신들이 정(淨)하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의미한다. 이 잃은 양의 비유는 하나님의 관심이 온통 이 불쌍한 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귀한 자식을 잃고 찾아 헤매는 부모의 아픔과 희생과 속상한 심정처럼 이들 잃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이다. 잃은 자를 찾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초비상사태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목자이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참 모습이다. 예수님은 잃은 자들을 찾기 위해 목자로 오셨고, 그들을 찾으시려고 공생애 내내 십자가의 길 가시밭길 험한 길을 걸으셨으며,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잃은’은 목자에게 주인에게 아버지에게 ‘찾은’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러나 ‘찾은’은 ‘잃은’의 대가를 상쇄시킬만한 기쁨을 선물한다. 그리고 죄인은 회개함으로 ‘잃은’에 따른 빚을 청산할 수 있다.
여인(성령님)의 심정
누가복음 15장 8-10절에서 예수님은 열 개의 드라크마가운데 하나를 잊어버린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부지런히 찾다가 찾아내면 너무 기뻐서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그 기쁨을 함께 나누듯이 하나님께서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면 크게 기뻐하신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드라크마 비유를 통해서 여인으로 묘사된 성령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하신 것이다. 여기서 여인의 등불은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조명의 사역, 즉 죄인을 깨우치시는 사역을 상징한다.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로써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한 드라크마는 이웃까지 초청해서 기쁨을 나눠야할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크게 기뻐한 이유는 그 돈이 예사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열 드라크마”는 신랑이 결혼할 때 신부에게 준 결혼반지와 같았다. “열 드라크마”는 줄에 꿰어있었고, 결혼한 여성의 머리장식에 쓰였다. 이 머리장신구를 잠자리들 때에도 풀지 않는다는 해설이 있고, 빚을 갚지 못했을 때에도 이 “열 드라크마”만큼은 차압당하지 않을 만큼 결혼한 여성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런데 이 “열 드라크마”를 꿴 줄이 끊어져 드라크마들이 흩어졌고, 나머지 한 개를 찾지 못했다면, 여인은 돈 자체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닌 결혼증표를 손상시킨 상실감으로 인해 이 은전을 열심히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2천 년 전 보통 유대인들의 집은 구석돌과 초석 말고는 흙벽돌로 지어졌다. 대개는 벽면을 석회로 바랐고, 우리 말 성경에 23번 정도 “다락”으로 번역된 복층으로 된 집이었다. 지붕은 각목을 얹고 갈대나 나뭇가지들을 깐 후에 진흙으로 발랐다. 지붕이 슬래브 형태였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았다.
유대지방은 강수량이 매우 적고 건조한 지중해성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지붕이 튼튼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1층은 짐승의 우리, 곡식저장고, 부엌 등으로 사용되었고, 바닥에 돌을 깔아 청결상태를 유지했다. 2층은 식사, 잠자리, 손님접대 등에 사용되었다.
2천 년 전 보통 유대인들의 집에는 유리나 창호지와 같은 소재가 없었고, 비와 모래바람과 열기가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창문을 작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낮에도 집안이 어둔 편이었다. 실제로 이 창구멍은 채광보다는 집안에서 피우는 연기를 빼내기 위한 굴뚝이었다. 드라크마를 꿴 줄이 끊어져 바닥에 흩어진 10개의 드라크마 중 나머지 한 개를 마저 찾기 위해서 여인은 등불을 밝혀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한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지 하나가 아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아니한 손가락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지구촌 60억 인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한 존재들이다. 선한 목자가 100마리의 양 중에서 1마리, 즉 1퍼센트를 잃었다고 그 양을 포기하지 않듯이,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한 개는 10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이 한 개가 있어야 온전한 사랑의 증표가 되듯이,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심정과 잃은 은전을 부지런히 찾는 여인의 심정은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과 성령님의 심정이다. 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이웃에 대한 마음이 바로 이런 심정이라고 역설(力說)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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