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강34]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4(눅 1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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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4]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4(눅 16:1-31)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는 지혜
누가복음 16장은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교훈이다. 16장에 불충한 청지기, 돈을 사랑하고 높임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가운데 영원한 처소에 도달한 거지 나사로는 다소 난해한 불충한 청지기 비유를 풀 수 있는 열쇠이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22절) 들어가 안식을 누리는 반면, 부자는 죽어 타르타로스의 불 못에서(24절)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재물로는 “영주할 처소”(9절)를 살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13절)는 교훈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재물과 혈통과 권세로 얻을 수 없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듯이, 복음적 실천으로만 침탈할 수 있다(16절)고 말씀하셨다.
1절에서 “어떤 부자”는 하나님이요, 불충한 “청지기”는 모든 인간의 대표이다. 그는 빛의 아들도 되고, 이 세대의 아들도 된다. 그는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우리 자신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두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인간은 만물을 만드시고 만물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위치에 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제 것처럼 낭비한 자가 불충한 청지기였다. 주인의 것을 주인의 것으로 알지 못하고 제 것처럼 착각하여 함부로 쓴 자가 불충한 청지기였다.
그랬던 청지기가 깨닫게 된 것은 1절의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세상의 평판 때문이었다. 유언비어는 민중의 신음이요, 민심이 천심이란 말이 있듯이, 그의 평판이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닿았다. 2절에서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뜻한다. 여기서 “직무” 또는 “직분”은 생명 또는 목숨을 뜻한다.
죽음은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아야하는 순간이다. 다행한 것은 이 청지기가 늦게나마 자기 잘못을 깨닫고 지혜롭게 처신했다는 점이다. 그 행위가 빚진 자들의 빚을 감면시켜 준 것인데, 회개를 뜻한 것이다. 청지기는 삭개오의 심정으로 자신이 고리로 착취하고 괴롭혔던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깎아주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서 투자와 증식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불법으로 증식한 재물을 풀어 피해를 입혔던 자들에게 화해를 청한 것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는 말씀이 이 뜻이다.
비유에서는 빚진 자 두 명이 대표로 언급되었다. 청지기는 그들을 불러 보통 노동자의 일이 년 치 품삯에 해당되는 500데나리온씩 동등하게 감면해 주었다. 6절에서 “기름 백 말”은 올리브나무 92그루에서 짤 수 있는 2,300리터의 기름으로써 1,000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되는데, 그 절반을 감면시켜줬다. 7절의 “밀 백 석”은 27,500킬로그램이고 2,500데나리온의 가치에 해당되는데, 그 중에 20퍼센트를 감면시켜줬다.
10절의 “지극히 작은 것”은 11절의 “불의한 재물”을 말하고, 10절의 “큰 것”은 1절의 “참된 것”을 말한다. 청지기는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한 재물”을 풀어 “큰 것,” 즉 “참된 것”을 샀기 때문에 칭찬을 들은 것이다. 재물은 그 재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인간의 우상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의 어리석음
14-18절의 바리새인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야지, 돈을 사랑하거나 스스로 옳다는 자기우상에 빠지거나 사람 중에 높임을 얻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문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능력과 재물을 숭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눈에 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한다. 불충한 청지기가 왜 칭찬을 들었는지,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하나님의 눈에 들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 있었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모두 섬긴 민족이다. 유대인들은 재리에 밝고 돈을 밝히는 민족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거나 13절처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교훈한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재물관을 보여준 것인데, 같은 하나님을 믿는 두 종교에 왜 차이점이 생긴 것일까?
구약성서에는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내세의 개념이 없다. 그 이유는 구약성서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과 그 땅의 존속을 위한 언약(모세오경)과 언약준수여부에 관한 성찰의 글(예언서)과 섬김의 글(성문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복은 땅의 소유와 그 땅에서 누리는 부와 장수와 자손의 개념이다. 유대인들에게 복은 전적으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다. 그 복을 얻자면, 실용적이고 공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가나안땅을 내세의 천국 또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현세보다는 내세에 소망을 두고 산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복은 잠깐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안식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영주할 처소”를 준비한 청지기와 나사로를 부자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한 것과 정한 것과 거룩한 것으로 나눈다. 언약법과 랍비들의 울타리 법들을 잘 지키는 것이 정한 것이고, 정한 것만 먹고 행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반(反)하는 것이 부정한 것이다. 가난과 질병은 부정한 삶에 대한 대가란 것이 유대인들의 믿음이었다. 정한 것만 먹고 행하는 거룩한 삶은 그 대가가 부와 명예와 권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부는 거룩한 삶에 따른 당연한 대가이고, 복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의 재물에 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여기서 나왔다.
유대인들은 수천 간 떠돌이와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 시민권도 참정권도 없이 남의 나라에 얹혀살았던 유대인들이 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은 돈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벌고 돈을 불리는 수완을 키웠고 그 방법을 후손에게 전수하였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금융업을 만들고, 세계경제를 손에 쥘 수 있었던 이유이다.
소수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공동체의식이 남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표시를 몸에 지닌 선민공동체였기 때문이고, 의지할 곳이 없는 떠돌이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고, 구제에도 적극적이었으나 배우자, 자녀, 부모 순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뒀다.
빛의 아들들의 지혜로움
“돈을 좋아하고,”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며,” “사람 중에 높임을 받고자”하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이 세대의 아들들이 갖는 어리석음과 음부의 세계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들어간 불쌍한 부자의 상징이다.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면,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 “큰 것” 곧 “참된 것”을 주시지 않는다. “재물”은 명예와 권세와 더불어 “작은 것”에 불과한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참된 것”은 “큰 것”으로써 영원하고 복된 것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추구하는 바, 부와 명예와 권세를 우상시하면, 죽어서 음부에 들어간 부자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이 추구하는 바, 보물을 하늘에 쌓아 영주할 처소를 준비하게 되면,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헌데 투성이의 거지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다.
나사로는 히브리어로 ‘엘리에셀’ 즉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란 뜻이며, 흔한 이름이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마 6:20) 영주할 처소를 준비하라는 말씀의 결론부분이다. 여기에 천사와 음부가 나온다. 음부는 그리스신화에 나오지만, 천사가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나사로 비유에 등장하는 나사로(엘리에셀), 천사, 아브라함은 모두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사건들 속에 출현하는 인물들이다(창 15:2, 19:1).
구약성서가 말하는 ‘음부’(하데스)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무덤을 의미한다(행 2:27). 그러나 23절의 부자가 죽어서 간 음부는 타르타로스를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신화는 음부가 지하 깊은 곳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신화에서 음부는 지상세계와 여러 강들로 연결되는데, 비통의 강에서 시작되어 시름의 강과 분노(불)의 강을 거쳐 망각의 강으로 이어진다. 망각의 강을 건너면 너른 벌판이 나오는데, 벌판 건너편에는 증오의 강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낙원인 엘뤼시온(샹젤리제)이 있으며, 왼쪽에는 지옥인 타르타로스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하나님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천국이라 불렀다. 그리스신화가 낙원을 지하에 있다고 말한 것과 차이가 난다. 또 신약성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고 못 받은 것에 따라서 낙원과 타르타로스로 나뉜다고 가르친다. 신약성서에서 낙원이 지하에 있다는 암시를 보인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타르타로스는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벧후 2:4) 혹은 “흑암에”(유 1:6)란 표현에서 보듯이 지하를 연상케 한다. 베드로와 유다는 이곳을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 심판 때까지” 가두는 곳으로 설명하였다. 이밖에도 “무저갱”과 “불과 유황 못”이 있는데, 무저갱은 화산의 용암 구덩이(계 9:2)를 연상시킨다. 무저갱은 적대세력인 박해자가 나오는 곳이고(계 11:7), 사단이 일천 년 동안 갇히는 곳(계 20:3)이다. 그리고 “불과 유황 못”(계 20:10)은 예수님 재림이후에 생길 영원한 지옥이다. 이곳은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새 하늘과 새 땅과는 상반된 곳이다.
부자는 왕처럼 입고 먹고 행세했지만, 제집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에게 무관심했다.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개념이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경고와 가난한 이웃들을 무시하고 혼자 의인인척 외식하며 호의호식한 삶의 대가는 “불과 유황 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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