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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5]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5(눅 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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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456 2013.03.06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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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35]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갖춰야할 덕목5(눅 17:1-19)

용서, 믿음, 순명(順命)

누가복음 17장 1절의 “실족케 하는 것”(skandalon)은 덫, 올무, 함정 등을 의미한다.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행위를 뜻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올무를 놓아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모의했던 것(마 22:15)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곤”(눅 6:7) 했던 것이 여기에 속한다.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신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16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고 하셨다.

2절의 “작은 자”는 어린아이를 지칭한 것일 수 있으나 제자, 믿음이 약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이방인을 말한 것일 수 있다. 18장 9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3-4절의 용서에 관한 말씀은 1-2절의 실족하게 하는 자가 당할 화와 상반된 말씀처럼 보인다. 3-4절에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형제의 범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포함되는지가 불확실하다. 제자들과 보통의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만일 그들이 회개한다면 용서해야한다는 점에서는 형제의 범위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형제”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형제들을 말씀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형제를 횟수에 제한두지 말고 무한정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5절에서 제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믿음을 키워달라고 청하였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라고 청한 제자들의 말속에는 “엄청난 믿음을 소유한 자라면 몰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라는 반박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6절에서 매우 작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취지로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해도 그것이 명령에 순종할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그리고 7-10절에서는 노예가 주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의무이지 자랑거리가 아니며,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도 여전히 종은 주인에게 자신이 무익한 자라고 말해야 하듯이,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제자들이 순명(順命) 할 것을 충고하셨다.

가톨릭에서는 순명(obedience)을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명령에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순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순명은 그 범위에 제한이 없는 절대 순명이다. 절대 순명한 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노예의 절대복종

노예의 절대복종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한 바울의 고백과 동일하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한 것은 자기운명의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우리 자신의 운명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 자신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신가?

그리스 로마 사회는 자유민이든 노예든 삶 자체가 처참하였다. 가난했고,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난리를 겪을지, 언제 노예로 팔릴지, 언제 겁탈을 당할지,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던 때였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와 바울은 만민이 평등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정작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렀다.

바울 당대에 노예는 소 돼지와 같은 주인의 재산목록에 불과하였다. 로마제국은 해방노예들에게 일반시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였지만,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인권도 권리도 보장하지 않았다. 주인은 노예를 채찍질하거나 투옥시키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죽일 수가 있었다. 또 노예는 동물처럼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고, 몸에는 불 인두로 지진 노예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인은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로 정의하였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밝혔을 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노예의 몸에 새겨진 주인의 흔적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란 표현이 자기인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란 어떤 경우에도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노예처럼 온몸으로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다.

만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뜻이, 노예의 운명이 그렇듯이, 절대 순종이라면, 그것이 도를 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도 어떤 절대운명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절대 신(神)이시지만, 절대 신이시기 때문에 갖는 제한이 있다. 하나님에게 아무런 제한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게도 몇 가지 제한이 있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들을 보면,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기할 만큼 절대 신이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같은 표현들에는 ‘신실하시다,’ ‘미쁘시다,’ ‘믿을 만하시다,’ ‘사랑이시다,’ ‘변함이 없으시다,’ ‘실수가 없으시다’가 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얽매는 어떤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 신에게는 아무런 제한도 속박도 없을 것 같은데, 절대 신이기 때문에 비켜갈 수 없는 어떤 속박과 제한이 있다. 그것은 마치 대통령이기 때문에 겪어야하는 제한과 속박, 연예인이기 때문에 겪어야하는 제한과 속박처럼 하나님께도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할 때, 자신의 운명적 사랑을 예수님께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하나님의 운명적 사랑을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총과 감사

누가복음 9장 52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미 사마리아 접경에 도착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7장 11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라는 말씀이 나온다. 9장 52절의 정황으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마리아입성이 막혔고, 동편지역으로 우회해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를 계속했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데가볼리와 베레아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데가볼리와 베레아를 갈릴리에 속한 지역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고, 11절에서 누가가 언급한 ‘갈릴리’는 사마리아에 인접한 ‘베레아’였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 당시 요단 강 건너편 동쪽지역에 북쪽으로 데가볼리와 남쪽으로 베레아가 있었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동편과 사마리아 북쪽에 접경한 지역이었고, 베레아는 사마리아와 유대지방에 인접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베레아에 대한 언급이 없고 데가볼리는 마태복음에 한 차례, 마가복음에 두 차례 나온다. 마태복음 4장 25절을 보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이란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 사마리아가 빠졌다. 사마리아는 데가볼리처럼 마태복음에 단 한차례 언급되었는데, 이방인과 동일개념으로 취급되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 사마리아지역이 두 번, 사마리아 사람이 두 번, 사도행전에 여덟 번 언급되었다. 누가문서에서 사마리아인은 여행에서의 배척을 강조하는 9장 52절을 빼고는 10장 33절의 선한 사마리아인과 17장 16절의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에서 보듯이 매우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18절을 보면, 예수님도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셨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722년 앗수리아의 침략으로 철저히 붕괴되었고, 이후 사마리아에 잔류한 자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써 피와 종교가 섞이게 되었다. 그들 역시 야훼 하나님을 섬겼지만, 남쪽 유대인들이 판단할 때 그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고, 바울과 함께 이방인 선교에 일생을 헌신했던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인비유와 나병에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마리아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방인들의 구원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강조했다고 보아진다. 이것이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점이다. 기독교는 민족성별과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야훼를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열방 민족의 하나님으로 원위치 시켜드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바울과 누가와 같은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앙의 핵심 가운데 한 가지가 받기 위한 감사가 아니라,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이다. 여기 사마리아인도 나병에서 건짐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 나병을 고침 받은 열 사람이 모두 유대교를 믿는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나병이란 천형에서 건짐을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 지옥의 형벌이란 천형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수고와 희생을 마다한다면, 감사의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거둘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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