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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0]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4(마 20: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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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593 2012.04.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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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0]새천년시대에서의 실천윤리 4(마 20:17-34)

새천년시대: 공동선이 추구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품꾼으로 뽑힌 사람들은 그들보다 늦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고 동일하게 하루 품삯을 받은 사람들보다 재수가 없거나 운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뽑혀 일터에 나간 것은 그들이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도원에 늦게 뽑혀 온 사람들보다 일터에 뽑혀나갈 확률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약속받은 임금을 다 받고도 주인에게 불평을 한 것은 자기들보다 일터에 뽑혀나갈 확률이 훨씬 낮은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평등을 옹호한 전 하버드대 정치철학교수 존 롤스는 개인의 타고난 재능은, 노력으로 일군 성공임을 인정할지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공(功)이 아니라 운(運)이 좋았던 것이므로, 그 재능을 개인만을 위해서 쓰지 않고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기 위한 정책, 곧 소외계층에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우대정책과 복지정책을 펼쳐서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롭고 선하다는 윤리철학을 제공하였다. 반면에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이 타인의 행복이나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능력위주, 무한경쟁, 자유시장, 적자생존, 양육강식, 힘의 논리를 주장한다. 그들은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수단들과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에 반대한다. 만일 국가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드린다면, 약자는 누가 보호할 것인가?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은 부와 건강과 명예와 권세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가난과 질병을 죄 때문으로 여겼다. 따라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가난과 질병은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정 반대였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이 누리는 행운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셨다(마 23:23).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혼자는 아니다. 혼자서는 부든 명예든 권세든 누릴 수가 없다. 개인이 누리는 부와 명예와 권세는 모두가 사회와 국가가 있음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인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도, 그가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면, 그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공동체가 발전하면 개인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발전은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고, 공동체의 발전은 개인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

이웃을 사랑하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하나님께 행한 바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이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께 행하는 것과 사람에게 행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잊고 지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20)는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새천년시대: 눈뜬 자들의(1)

마태는 마가처럼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세 차례, 16장 21절, 17장 23절 그리고 20장 19절에 각각 소개하였다. 20장 17-34절에서 보듯이, 수난예고직후에 제자들의 몰지각한 행동이 나오고, 이어서 예수님의 제자훈련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마가의 기록의도 때문이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우매함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우매함을 깨우치려한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자들의 몰지각한 행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우매한 행동인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들은 세례 요한이 죽고 메시아신분을 밝히신 다음부터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에로 향하는 길에서 이뤄졌다. 예수님께서 성공을 거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로 향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야할 때가 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때에 대한 예수님의 자각은 매우 명확하였다. 이를 마태는 “이때로부터”(마 16:21)라고 소개하였고, 누가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라고 적었으며, 요한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증언하였다. 요한의 증언처럼, 예수님은 주후 30년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민중이 원했던 메시아는 붙잡혀 고문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줄 자였다. 이 때문에 갈릴리지역에서 명성을 얻고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증명하는데 성공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민중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머지않아 통치자들이 될 거라는 꿈에 부풀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처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발걸음이 쇳덩이를 매단 듯이 무거웠고, 머리엔 수심으로 가득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행은 정말 지독히 고독하고 고통스런 것이었다. 제자들이 함께했고, 민중이 노변에서 환호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고 생각이 되어야할 제자들은 명예와 권세와 재물에 눈이 멀어 상황파악을 할 수 없게 된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허풍이 가득하였으며, 머리엔 권모술수만이 난무하였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세 번이나 고난당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몰이해를 깨우치려 하셨다.

그러나 수난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첫째로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붙들고 말린 것이었다. 둘째는 심히 근심한 것이었고, 셋째는 치맛바람 로비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말린 것과 근심한 것이 스승을 위해서였는지, 자신들의 꿈의 실현을 위해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가지 모두 다 옳을 수 있다. 그들의 반응이 순수했는지, 불순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치맛바람 로비가 마지막 세 번째에 소개된 것을 보면,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여리고의 두 맹인처럼 눈을 떠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천년시대: 눈뜬 자들의(2)

29-34절은 눈을 떠야할 제자들을 위한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제자들이 또한 우리들이다. 여리고의 두 맹인이 눈뜨기를 사모하여 소리 질러 예수님을 찾으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청한 것 같은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두 맹인은 예수님의 그 오랜 자비를 입고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다. 천국은 바로 이런 눈뜬 자들의 나라이다. 눈을 뜬 자들의 세상은, 26-28절처럼, 크고자 하기보다는 섬기는 자들의 세상, 으뜸이 되기보다는 자원하여 섬기는 자들이 되는 세상,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기를 즐기는 자들의 세상이다.

눈뜬 소경을 주제로 쓴 소설로써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눈이 멀고, 눈먼 사람을 만나는 사람마다 눈이 멀고, 그래서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리는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참혹함을 그렸다. 눈먼 한 사람이 전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현대인들을 눈뜬 소경 혹은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않는 소경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눈먼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참혹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마구는 눈먼 다수보다도 눈뜬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말한다. 눈먼 대중이나 눈먼 ‘대’자 붙은 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뜬 모세, 눈뜬 엘리야, 눈뜬 예레미야, 눈뜬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살린다는 교훈을 준다.

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아니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안과의사의 아내’이다. 이 여인 한 사람을 통해서 반전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인간애가 살아나고, 연대의식이 살아나고, 나눔의 정신이 살아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소외되고 낙오된 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또는 그런 식으로 눈먼 죽음의 도시가 눈을 뜨기 시작한다. 눈먼 한 사람으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눈먼 죽음의 도시가 되기도 하고, 눈뜬 한 사람으로 인해서 도시 전체가 활기찬 도시가 되기도 한다. 눈뜬 한 사람이 전체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유대인들과 다름없이 예수님을 땅의 문제와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믿고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자 메시아이심을 증명할 하늘로부터 내리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표적들을 잇달아 행하자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얻게 될 명예와 권세와 재물에 점차 눈이 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말리고 그 때문에 사단이란 소릴 듣는가 하면, 누가 더 높으냐며 서로 다투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치맛바람 로비를 통하여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떠 자신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여리고의 두 맹인이 눈을 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듯이 말이다.

<마태복음 18-20장의 내용은 천국에서의 실천윤리 또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윤리에 관한 일련의 말씀들이다. 천국은 바보들이 대접받고, 소외된 자들이 관심 받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여성과 아이들과 가난한 자들과 노동자들이 보호받고, 차등원칙이 적용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고, 공동선이 추구되는 눈뜬 자들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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