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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5]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투쟁 5(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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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623 2012.05.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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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35]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투쟁 5(마 23:1-12)

새천년시대 개방을 가로막는 울타리 법

예수님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비난은 대적자들에게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추종자들인 민중과 제자들에게 지도자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빌라도의 공판장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이들조차도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있다.

2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씀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전한 율법(Torah)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Rabbi)들이다. 그들이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할 때 앉았던 의자가 ‘모세의 자리’이다. 따라서 ‘모세의 자리’란 모세가 전한 율법을 전수받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공적지위를 가진 교사란 뜻이다.

율법은 히브리인들이 유월절 날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오순절 날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모세를 통해서 전수받은 언약법이다. 이 율법을 담았던 상자가 성막 지성소 서편에 놓인 법궤요, 그 뚜껑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이다. 성전을 대신한 회당에서도 율법을 담은 법궤는 서편에 놓였고 커튼을 드리워 회중석(13세 이상의 계명의 아들들의 공간)과 구별하였다. 이 커튼 앞 강단(Bema)에 회중석을 마주보고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있었다. 이 의자에 앉아서 율법사들이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모세의 율법(Torah)과 구전법(Mishnah)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613개의 계명을 풀어 설명할 모세의 권위를 위임받은 교사들인 만큼 3절에서 그들의 가르침은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들은 과연 자기들이 말한 것을 행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율법을 몹시 사랑했고 눈물겹도록 열심히 지켜왔다. 문제는 그들의 행위가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계명들의 본질과 핵심에서 많이 벗어난데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계명들의, 계명들에 의한, 계명들을 위한 행위들, 즉 죄인과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정의와 사랑과 믿음을 저버린 행위들이 문제였고, 거룩한 척, 의로운 척하며,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잘 보여 존경받으려는 행동들을 본받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행동들,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행동들을 삼가라는 뜻이다.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에서 ‘무거운 짐’은 613개의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랍비들이 만든 울타리 법들(Gezeirot)로 이해될 수 있으며, 보통사람들이 잘 지키지 못하는 법들이다. 또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는 뜻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울타리 법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어려움을 배려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빙자하여 어려운 이웃들에게 가중한 짐을 지우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에 상반된다.

새천년시대 개방을 가로막는 랍비들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반드시 잡신 혹은 거짓 신들만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생명도 없고, 숨도 쉬지 않는 우상들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잠 16:5)이다. 교만의 문제점은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고 유한한 피조물인 주제에 남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드는 것이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5-12절에서 이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세 가지 칭함을 받지 말라고 충고하셨다.

첫째, 5-8절에서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예배목적으로 삼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마와 팔에 붙들어 매는 트필린(tefilin)이란 말씀상자를 보통사람들보다 크게 만들어 붙이고, 겉옷과 기도보(talit)에 매다는 옷술(tzitzit)도 남들보다 길게 매단다고 지적하셨다. 말씀묵상과 기도에 집중하기보다는 남에게 과시하려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꼬집으셨다. 랍비란 ‘나의 주’ 혹은 ‘큰 자’란 뜻이므로 이에 해당되는 랍비는 오직 한분뿐이라고 하셨다. 그밖에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일 뿐이므로 가르치는 교사라 할지라도 군림하는 자세를 버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할 것을 강조하셨다.

둘째, 9절에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고 하셨다. “땅에 있는 자”란 랍비를 말한다. 가톨릭사제를 신부라 부르듯이 일찍이 유대인들은 훌륭한 인물들을 아버지라 부르곤 하였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를 아버지라 불렀고(왕하 2:12), 이스라엘의 왕도 엘리사를 아버지라 불렀다(왕하 6:21, 13:1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로 불리기를 좋아했고, 대학자 힐렐과 샴마이에게는 ‘세상의 아버지’란 호칭을 부여했다. 그러나 아버지라 칭함을 받을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뿐이라고 하셨다.

셋째, 10절에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지도자란 모든 것을 두루 가르치는 랍비를 말하며 가정교사와 같은 자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가정교사처럼 국민의 일상을 간섭하고 삶을 통제하려하였다. 예수님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으실 분은 한분 그리스도뿐이라고 말씀하시며 11-12절에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으로 위선과 교만의 위험성을 경계하셨다.

예수님께서 5-12절에서 사용금지령을 내린 세 가지 칭호, 랍비, 아버지, 지도자는 거의 동일한 개념의 반복으로써 교사를 지목한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교사라 불리는 것을 삼가도록 당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이 참 교사이시고 참 아버지이시며 참 지도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은 예수님이 독생자 하나님 신분을 버리고 자기를 낮춰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했더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들로부터 예배를 받게 하신 것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들을 높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새천년시대 개방을 가로막는 외식

마태복음 19-23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강조한 곳이다. 13장에 실린 8개의 천국비유를 마태복음의 중심축으로 봤을 때 예수님의 행동의 권위가 강조된 10개의 기적이 실린 8-9장과 대칭을 이루는 곳이다. 후반부 14장부터는 감춰왔던 메시아 신분을 노출하시고 정치종교의 중심지인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메시아를 거절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전면전을 펼치신 장면들이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외식하는 자들”로 폄하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는 이 “외식하는 자”란 표현은 대부분 마태복음에서 쓰였다. 613개의 계명들과 수많은 울타리 법들을 사랑하고 또 눈물겹도록 철저하게 지키지만, 형식과 외형에 치우쳐 본질과 정신인 정의와 사랑과 믿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잘 보여 칭송을 받으려고 위선과 가식으로 행동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가복음 18장 9절에 의하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외식하는 자” 또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란 표현은 마가복음에 1회, 누가복음에 3회 사용되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13회나 사용되었다. 외식하는 자들이란 다름 아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칭한 표현이었다. 3절의 앞부분,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뜻이고, 3절의 뒷부분,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는 4절의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에서처럼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열심히 행하지만, 위선과 가식이 가득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잘 보여 영광을 받으려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속살을 내보이고 가슴을 치며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 위선과 가식이 가득한 제 몸을 화려한 의복 속에 숨기고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보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자기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의 족쇄에 묶여 강도당하여 거의 죽게 된 자를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매정한 인간이 되지 말고, 비록 개 취급당하지만, 선행을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가르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모르거나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자적인 의미에 매어서 옳은 일을 실천하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땅의 것인가, 하늘의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영원한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영적인 것인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인가, 하나님께 보이려는 것인가,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인가? 새천년시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하던 행동을 중지하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새천년시대에 합당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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