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강43]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최후승리 4(마 2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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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43]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최후승리 4(마 27:1-56)
새천년시대: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유대총독부는 예루살렘 서북쪽 약 112㎞지점에 위치한 항구 도시 가이사랴에 있었고,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지방의 수도 디벨료에 머물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헤롯궁전과 안토니우스 성곽에 로마군병영과 총독관저가 있었다. 빌라도와 헤롯 안디바는 민란이 일기 쉬운 유월절에 정치적 책임자로서 혹은 행사참여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된 직후 밤새도록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공회원들 앞에서, 빌라도 총독 앞에서, 헤롯 안디바 앞에서, 다시 빌라도 총독과 군중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유월절 날 아침 8시경에는 살점을 도려내는 채찍을 맨살에 맞으셨고,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 형틀에 쓰일 가로대를 짊어지셨으며, 기도시간인 아침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기도시간인 낮 12시경부터 저녁희생을 드리는 오후 3시경까지, 하루 중 태양이 가장 강렬해야할 바로 그 시각에 칠흑 같은 어둠이 지속되었으며, 예수님은 저녁희생제물이 드려지는 바로 그 시각에 운명하심으로써 인류의 화목제물로써 하나님께 바쳐졌다.
1968년 예루살렘의 기밧트 하미브타르 발굴에서 1세기경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유골함 속에는 요하난 벤하콜이라는 20대 남자의 유골이 들어있었다. 이 유골 중에는 18cm 길이의 굵은 쇠못이 박혀있는 발뒤꿈치 뼈가 있었다. 쇠못은 나무에 박힌 후 빠지지 않게 뒤끝이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었고, 십자가는 올리브나무였다. 그리고 쇠못은 죄수의 발등이 아니라, 발뒤꿈치 옆 복사뼈 밑에 박혀 있었으며, 아카시아 나뭇조각이 죄수의 발을 받치고 있었다. 유골함 속에는 큰 나무망치에 맞아서 부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강이뼈도 있었다. 발견된 손과 손목뼈에서는 손바닥이 아닌 손목 위 두 개의 팔뼈 사이에 큰못을 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2천 년 전에 시행된 십자가 처형식이 어떠했는가를 재구성해볼 수 있게 되었다.
죄수가 십자가형을 받으면, 상의를 벗긴 채 나무기둥의 허리부분에 양손이 묶인다. 그러면 죄수의 벌거숭이 등이 하늘을 향하게 된다. 죄수의 등에다 동물의 뼈나 철 조각이 매달린 채찍으로 내려치면 피가 튀기고 살점이 도려내진다. 체벌이 끝나면 죄수는 십자가의 가름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형장을 향해 걷는다. 도착하면 짊어지고 온 가름대를 기둥에 맞춘다. 그리고 땅에 눕혀진 십자가나무 위에 죄수의 옆구리가 나무 바닥에 닿게 눕힌다. 그리고 죄수의 두 발이 세로 기둥에 나란히 모아진 상태에서 복사뼈 바로 밑에다 쇠못을 박는다. 굵고 울퉁불퉁한 쇠못은 두 발의 복사뼈를 관통한 다음 나무에 깊이 박히게 된다. 그러고 나서 죄수의 상체를 90도 비틀고 무릎을 꿇려서 바로 눕힌다. 다음에는 끈으로 양쪽 팔목을 가름대에 묶고 양손의 손목뼈 사이에 못을 박는다. 이렇게 한 다음 십자가를 세워 고정시킨다. 상체가 뒤틀린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은 산소부족과 호흡곤란으로 큰 통증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쉽게 죽지는 않는다. 낮에는 뜨거운 땡볕과 밤에는 추위를 견뎌야 하고, 때로는 날짐승의 공격을 받으며, 고통 중에서 서서히 죽게 내버려둔다. 그러나 죄수를 급히 죽여야 할 경우에는 큰 나무망치로 정강이뼈를 쳐서 부러뜨린다. 그러면 횡격막이 숨통을 조여 죽게 된다. 예수님은 못 박히신지 6시간 만에 운명하셨다.
새천년시대: 어둠속에서 절규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6시간 정도 되었을 무렵에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절규하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이라고 했다. 이 절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의 절규는 산통이 옥동자분만을 위한 것이듯이 인류구원이란 옥동자분만을 위한 것이었다.
둘째, 예수님의 절규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선 어둠의 권세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예수님의 절규는 인간에게 막혀있던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예수님의 절규는 어둠의 세력을 찢는 외침이었다. 이 절규는 이 땅의 사람들이 종종 경험하는 절망의 하소연이기도 하고, 인류에게 빛과 생명의 축복을 예정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저주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비명이기도하다. 이 절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휘장을 찢어 두 조각을 내듯이 사단의 어둠의 권세를 찢는 승리의 함성이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 육시부터 구시까지,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세 시간동안 지속된 어둠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어둠이 지배한 세 시간은 흑암의 권세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상징이다. 어둠의 세력이 예수님을 절규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절규에 어둠의 권세가 찢기고 말았다.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을 절명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절명에 죽음의 권세가 절명하고 말았다. 세 시간 동안의 어둠과 40여 시간 미만의 죽음은 부활의 여명과 승리의 함성을 위한 전조에 불과하였다. 갈보리 언덕의 어둠과 죽음은 먼동이 트기 직전의 침묵과 같은 것이었다.
둘째, 어둠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경험하는 절망의 현실이요, 하나님의 외면이자, 침묵이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 외면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말한다.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쓰여 있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돌리는 것은 저주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냉혹한 외면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 땅에 어두움이 내리자 하나님이 자기를 냉혹하고 무섭게 외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감하셨을 것이다. 시편 22편 24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말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고 한 말씀이 적어도 예수님께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이다.
셋째, 어둠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께 대한 하나님의 외면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외면이었다. 더불어 어둠을 찢는 예수님의 절규 또한 인류에게 빛과 생명의 축복을 예정하시고 자신에게는 어둠과 죽음의 저주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절규였다.
새천년시대: 율법의 요구를 마치시고
신약성경에 “다 이루었다”는 구절이 쓰인 곳이 요한복음 19장 30절, 로마서 13장 8절, 계시록 16장 17절, 21장 6절 네 곳이다. 계시록에서는 최후심판과 최종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6시간동안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들 가운데 한 마디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셨는가, 또 실제로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사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또 처음부터 죽음을 전제로 기록되었다. 예수님도 여러 차례 수난을 예고하셨고, “내 때”(마 26:18, 요 2:4, 7:6, 7:8) 혹은 “때가”(막 14:41, 눅 22:14) 또는 “승천하실 기약”(눅 9:51)이란 표현들을 사용하시면서 죽음의 때를 언급하셨다. 그만큼 예수님의 죽음에는 무언가 중요한 뜻이 있다는 암시였다. 예수님이 죄도 없이 권력욕에 찬 기득권층과 우매한 민중에 휘둘러서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은 이 중요한 숨은 뜻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 숨은 뜻을 만천하에 선포하시려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죽음의 사명은 공적생애 출발부터 예수님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었고, 이 짐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실질적인 십자가였다. 이 십자가를 어찌 잠시 짊어진 나무 십자가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선교였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를 이루셔야 했다.
첫째가 율법의 완성이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하였고, 야고보서 2장 10절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인간으로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롬1:18, 3:20). 그러므로 누군가 완전하신 분이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고 마침이 되실 필요가 있었다(롬 10:4). 그래야 그분을 믿고 신뢰함으로 의(義)에 이를 수 있고(롬 10:4, 9-13),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대교의 제물보다 더 좋은 제물이 되셔야 했다.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몸을 더 좋은 제물로 삼으셔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단 한 번의 완벽한 제사로써 흠이 많던 유대교의 제사들을 단번에 완성시켜 버리셨다.
셋째는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는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으뜸인 사랑의 사도가 되셔야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마 22:40)고 하셨다. 바울이 로마서 13장 8절에서 선포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시인 구상이 노래하였듯이, 정치종교지도자들의 수모를 받으며,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셨다.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서 그분은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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