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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44]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최후승리 5(마 27:57-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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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117 2012.06.1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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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44]새천년시대 개방을 위한 최후승리 5(마 27:57-28:15)

겟세마네 동산의 두 얼굴

고난주간사건들이 발생된 겟세마네, 골고다, 무덤, 이 세 가지 장소는 출애굽이후 히브리민족이 생활한 40년 사막과 요나가 보낸 삼일간의 고기뱃속의 원형이다. 또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을 보내시고 이어서 보낸 고난주간에 속하고, 우리 성도들이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 이 땅에서 시작하는 교회생활 또는 순례자의 삶에 연결된다. 히브리민족이 사막생활 40년 동안 가본적도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갔듯이, 예수님이 부활주일의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고 고난주간을 묵묵히 감당하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천국을 바라보고, 또 주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로 부활할 것을 바라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을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겟세마네, 골고다, 무덤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바보처럼 걸어야 한다.

예수님은 삼년 육 개월의 짧은 시련과 배척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우리 시간으로 주후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 (유대인에게는 금요일의 시작)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체포되셨고, 밤이 맞도록 심문과 수모를 당하셨으며, 7일 금요일 이른 아침에 불공정한 재판을 통해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셨고, 아침 8시경에 살점이 파이는 날카로운 채찍으로 맞으셨으며, 가시관을 쓰셨고, 지치고 상한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험한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다. 아침 9시경에 십자가 형틀에 못 박히셨고, 6시간만인 오후 3시경에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다.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의 굴 무덤에 안치되어 약 40여 시간이 지난 4월 9일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이른 아침에 놀랍게도 다시 사셨다. 로마군이 인봉한 굴 무덤의 돌문을 굴러내고 무덤 밖으로 살아서 나오셨다. 이후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셨으며, 5월 18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홀연히 하늘로 올리어가셨다.

추락과 승천,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두 얼굴이다. 예수님은 체포되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다. 쟁반처럼 크고 둥근 보름달빛이 스산하게 비취던 밤이었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듯이 예수님의 마음이 녹아내리던 밤이었다. 극심한 번민과 일그러진 낯빛으로 애절한 호소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리던 밤이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밤이 그대로 지새기를 애절하게 바라던 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밤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당하셨다. 제자들의 몰이해와 배신까지 맛봐야했던 씁쓸한 밤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할 날이 더 많았던 30대 중반의 한 장년의 꿈과 기대가 무참히 꺾이고 나락으로 추락하던 밤이었다. 이런 비극이 일어났던 겟세마네 동산에 한낮의 태양이 따사로운 햇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썩고 냄새나던 죽은 자들의 무덤에서 깨어나 육중한 돌문을 열어젖히고 나와 맞이했던 부활의 아침처럼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이날 예수님은 번민과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다 체포됐던 바로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위엄과 영광이 가득한 모습으로 승천하셨다. 무덤이 부활의 장소가 되었듯이, 나락으로 추락했던 장소가 위엄과 영광이 가득한 승천의 장소가 되었다.

골고다 십자가의 두 얼굴

1968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예수님과 동시대의 20대 남자 요하난 벤하콜의 유골에 박힌 쇠못과 꺾인 뼈를 해부학자들이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바닥에 놓인 십자가 위에 죄수를 가로로 눕힌 다음 가지런히 모아진 두 발의 복사뼈 바로 밑에다 18센티미터 정도의 큰 못을 박았다. 굵고 울퉁불퉁한 대못은 두 발의 복사뼈를 관통한 다음 나무에 깊이 박히게 되는데, 한번 박히면 뺄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죄수의 상체를 비틀어서 바로 눕힌 다음 끈으로 양 팔목을 가름대에 묶고 양손의 손목뼈 사이에 큰 못을 박았다. 이렇게 한 다음 십자가를 세워 고정시키면, 죄수의 상체가 90도 뒤틀린 상태로 아래로 처지게 되어 호흡에 큰 고통을 받게 된다. 이 때 망치로 죄수의 무릎 뼈를 쳐서 부러뜨리게 되면, 횡격막이 숨통을 조여 죽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십자가는 수치와 죽음의 상징이자 극형 중의 극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불행의 상징이 아니라, 행복의 상징이 되었다. 무능의 상징이 아니라, 능력의 상징이 되었다. 무지의 상징이 아니라, 지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 죄 사함의 능력, 구원의 능력, 악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지혜, 우리와 관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찾아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는 지혜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53장 1절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사실을 누가 곧이듣겠느냐,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물음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무덤이 부활이 되고, 어떻게 겟세마네의 고뇌의 장소가 승천의 장소가 될 수 있겠느냐? 어떻게 골고다의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가 영광과 구원의 십자가가 될 수 있겠느냐? 연한 순 같고 메마른 땅에서 나온 식물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게서 나타나겠느냐? 멸시를 받고, 버림을 당하며, 간고를 겪고, 질고를 겪어 마땅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느냐? 그렇게 당한 멸시와 질고와 슬픔과 고난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람들의 물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인하여 예수님이 받으신 징계가 변하여 평화가 되었고, 채찍 맞음이 변하여 치료가 되었으며, 십자가의 죽음이 변하여 구원이 되었다. 이것이 골고다 십자가의 두 얼굴이다.

동굴 무덤의 두 얼굴

동굴 무덤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100년, 태어나신 후 100년간 유행했던 유대인의 매장방법이었다. 동굴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 본실이 있고, 입구를 제외한 본실 삼면의 벽은 시신을 안치할 수 있도록 깎아 만든 평상들이 있었는데 머리를 두는 쪽은 베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두툼하게 높여 만들곤 하였다. 그곳에 시신을 눕힌 지 1년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보관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발견된 예수님 시대의 유골함들 가운데는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형제’란 글이 새겨진 약 50㎝ 크기의 유골함과 ‘가야바의 아들 요셉’이라 새겨진 유골함도 있다. 만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유골함도 함께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여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다.

동굴 무덤은 육체의 죽음과 음부의 상징이며, 정신적 죽음인 절망과 좌절, 폐쇄적 자폐적 상태의 상징이다. 또 동굴 무덤은 흑암과 무지의 상징이며, 죄악 세상의 상징이다. 성경은 이 무덤을 강 혹은 바다로 묘사하곤 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에 이른 것은 영적으로 무덤에서 살아나 하나님의 선민공동체로서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하며, 40년 후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이른 것은 성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것을 예표 한다. 또 우리 성도들이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에 이른 것처럼 영적인 죽음에서 살아나 하나님의 새로운 선민공동체로서 거듭난 삶을 의미하며,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된 후에 영혼이 천국에 이르는 것은 붉은 유리바다를 건넌 후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 선 흰옷 입은 구원받은 큰 무리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덤은 성도들에게 새롭고 영원한 세계로 이주하는 구원의 통로이다. 이것이 동굴 무덤의 두 얼굴이다.

이것을 제대로 입증해준 것이 나사로의 부활사건이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육체 없는 영혼상태로 천국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과 동시에 육체로 부활하여 신천신지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을 예시하는 사건들이었다. 나사로의 부활사건이 기록된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이나 나사로의 죽음의 때를 영광의 때로, 죽음과 무덤을 영광을 위한 것으로 설명하는데 있다. 굉장한 역설이지만,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다. 기독교인에게는 무덤이 오히려 영광이 되고, 죽음이 오히려 영광을 받을 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죽을병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으로 보았다. 성경은 죽어야 살고, 내려나야 얻고, 썩어야 열매 맺고, 부인해야 인정받는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롭고 영원한 삶의 출발점이요, 무덤은 부활이 일어나는 장소가 된다. 또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장차 올 더 좋은 것이요, 진정한 의미의 회춘이며, 영생의 시작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이 약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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