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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1]예수님의 관심(사명)(눅 5: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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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421 2012.10.28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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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강11]예수님의 관심(사명)(눅 5:1-39)

빈 배와 교회(복음)

예수님의 관심(사명)은 떡(빵)과 복음 또는 인간과 교회에 있었다. 누가복음 4장 4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하셨다. 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서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임명한 것이 5-6장의 내용이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중간 중간에 베푸신 기적들과 기도하신 모습들을 삽입하였다.

누가복음 5장 1-11절은 예수님의 수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다.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어진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부름을 받을 당시 그들의 배들은 모두 빈 배들이었다. 5절을 보면, 어부들이 떡(빵)을 얻기 위해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잡은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 5장 5절의 말씀은 6장 12절의 말씀에 대조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물질을 하려고 호수로 가시지 않고, 기도하시려 산으로 가셨다. 거기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얻으신 것이 12사도들이었다. 이 열두 사도들은 6-7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는 말씀처럼, 장차 교회라는 배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가득 채우게 될 것을 암시한 말씀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밤샘기도로 이뤄진 것임을 말한다.

호수는 세상이고, 배들은 교회들이며, 고기는 성도들이고, 어부들은 교회의 일군들을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세계에서 큰물 즉 바다, 호수, 강은 세상과 음부 즉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사람이 죽어 음부의 세계로 가려면 비통의 강, 시름의 강, 불의 강, 망각의 강을 차례대로 건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성경에서도 큰물 즉 바다, 호수, 강은 사단이 지배하는 죄악 세상이거나 죽음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으며, 요나도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 같은 맥락에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건짐을 받고 있고, 계시록에서 성도들은 하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에서 건짐을 받고 그 바닷가에 서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누가복음 5장 6절에서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이크투스”(ιχθυs, ichthus)이다. 공교롭게도 “이크투스”의 다섯 글자는 각각 '예수'(Iesus), '그리스도'(Christos), '하나님의'(Theos), '아들'(Huios), '구세주'(Sojomete)의 첫 글자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 즉 ‘이크투스’가 상징하는 바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물에 걸려 배에 오른 수많은 물고기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교회에 입문한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 즉 전도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빈 배인 교회에 관심을 갖고 밤샘기도를 하셨고 제자들을 통해서 만선을 이루셨다.

빈 배와 인간(빵)

빈 배는 인간들의 오랜 외로움의 상징이다. 빈 배는 인간들의 오랜 출렁임의 상징이다. 빈 배는 인간들의 오랜 헛수고의 상징이다. 빈 배는 인간들의 오랜 배고픔의 상징이다. 빈 배는 인간들의 오랜 병듦의 상징이다. 그런 빈 배에 예수님은 관심을 보이셨다.

빈 배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던 어부들의 상징이다(1-11절). 빈 배는 문둥병자의 상징이다(12-16절). 빈 배는 중풍병자의 상징이다(17-26절). 빈 배는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의 상징이다(27-39절).

빈 배는 깊은 데로 가기를 원한다. 빈 배는 만선의 기쁨을 원한다. 빈 배는 수고한 보람을 원한다. 빈 배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질고로부터 고침받기를 원한다. 오랜 외로움, 오랜 출렁임, 오랜 헛수고, 오랜 배고픔, 오랜 병듦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빈 배는 누군가의 깊은 관심을 원한다. 빈 배는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길 원한다. 빈 배는 의사를 필요로 한다. 누가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빈 배에 관심을 보이셨고,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으며,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고치셨고, 중풍병자에게 영혼과 육체의 질고로부터 해방을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빈 배에 관심을 갖고 채우셨을 뿐 아니라, 빈 배의 소유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빈 배들을 가득 채울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적재적소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36-39절). 헌 옷에 새 옷 조각이 적절치 않고, 새 포도주에 낡은 가죽 부대가 적절치 않듯이, 의사는 건강한 자에게 필요치 않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의 적재적소는 어디인가? 우리가 서야할 곳은 어디인가? 우리가 머물러야할 주소는 어디인가? 의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어야할 곳이 어디인가? 그곳은 건강한 자들의 현장이 아니라 병든 자들의 현장일 것이다. 그곳은 가득 채워진 현장이 아니라, 비어 있는 현장일 것이다. 그곳은 배부른 자들의 현장이 아니라 배고픈 자들의 현장일 것이다.

예수님은 빈 배들을 보시고 그 배들이 채워져야 할 것을 아시고 만선을 이루게 하셨다(1-11절).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엎드려 낫기를 구할 때, “손을 내밀어” 고치셨다. 예수님은 여기서 만족하시지 않고, 오히려 한 적한 곳을 찾아 가셔서 이 안타까운 현실을 놓고 기도하셨다(12-16절).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낫기를 원하여 지붕의 기와를 벗기기까지 했을 때 그 절박함을 보시고 그의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셨다. 그가 원하는 떡(빵)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복음(교회)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셨다(17-26절).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멸시의 대상인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이것은 인간의 문제가 육적인 문제 즉 떡(빵)과 건강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 즉 복음(교회)과 구원에 있어서 반드시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려 회개시키려 왔노라”(27-32절).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 존재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도록 만드신다.

빈 배와 인간다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회복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백정은 칠천반(七賤班)이라 불리는 포졸, 광대, 백정, 고리장(나무껍질을 벗겨 장을 만드는 사람), 무당, 기생, 갓바치(가죽신을 만드는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직업이었다. 일단 백정의 집에서 태어나면 다른 직업은 일체 가질 수가 없었고, 백정의 딸과 결혼해서 백정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 조선시대 40만 백정들의 운명이었다.

박성춘이란 사람도 이런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정부를 상대로 백정해방운동을 펼쳐서 얻은 이름이었다. 백정인 그에게 이름이라곤 없었다. 단지 박가로 불릴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장로가 되어 왕손(王孫)인 이재형(李載馨) 장로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같은 교회를 섬겼다.

박성춘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던 자신을 선교사 무어와 왕(王)의 주치의(主治醫) 에비슨이 천민인 자신을 자주 찾아와 치료해준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례를 받고 정식교인으로 출석하자 먼저 다니던 양반들이 교회를 떠나 양반들만의 교회를 따로 세우는 큰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박성춘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백정들을 전도하여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그리고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3년 후인 1898년에는 백정교회와 갈라섰던 양반교회가 다시 하나로 합칠 수 있었고 백정출신 장로와 왕손 장로가 한 교회에서 시무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였다.

백정 박성춘에게 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인간다움을 의미하였다. 예수님을 믿고 언문과 산술을 터득하여 장로가 된 박성춘은 백정들의 계몽과 해방에 발 벗고 나섰다. 그의 노력으로 ‘인간됨’의 상징이었던 ‘갓과 망건’까지 백정들도 쓰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백정의 신분을 벗은 박성춘은 은행가로 변신했고, 아들 봉출도 세브란스의학교를 나와 박서양이란 이름의 의사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다움을 의미한다. 박성춘의 사례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는 자에게 뿐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인간다움의 회복이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시대에 가난한 자들, 병자들, 세리들은 죄인취급을 당했던 빈 배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인간성을 되찾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며 신분이 상승하는 채움(회복)이 일어났다.

인간다움의 채움(회복)은 빈 배에 관심을 보이셨고, 병든 자에게 손을 내미셨던 예수님처럼, 병들어 죽어가던 박성춘에게 구원의 손길을 제공했던 선교사 무어와 왕의 주치의 에비슨처럼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도움의 손길을 제공할 때 일어난다. 인간의 삶은 어찌 보면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건진 것이 없었던 어부들의 헛수고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인간의 절망과 좌절과 허탈과 허기는 어부들의 빈 배만큼이나 공허감이 클 수 있다. 깊은 밤처럼 어둡고, 거센 파도처럼 술렁이는 서글픈 심정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오랜 외로움, 오랜 출렁임, 오랜 헛수고, 오랜 배고픔, 오랜 병듦을 예수님께 믿음으로 가져가는 자는 긍정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또 이런 현실을 꿰뚫어 보고 손을 내미는 자는 긍정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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