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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15]새천년시대를 위한 새 패러다임(마 9: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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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0,984 2012.02.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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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강15]새천년시대를 위한 새 패러다임(마 9:9-17)

패러다임의 전환

예수님보다 100여년 후에 태어난 이집트인 천문학자 프톨레미(Ptolemy)는 150년경에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다. 이 천동설이 1,500년대 종교개혁 당시까지 1,400여 년간 지배적인 우주관이었다. 유럽에서 개신교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폴란드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우주의 중심이 태양이며,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에 대전환을 가져왔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사고의 틀, 가치관, 세계관을 확 바꾼 것이었다. 당시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를 포함해서 다수였다. 옳은 소수가 그릇된 다수에 의해서 이단자로 매도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틀이 바뀌는 것을 일컬어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기존의 패러다임(paradigm)에 도전하셨다. 패러다임이란 사람, 사물, 사건을 보고, 문제 삼고, 해결하는 틀, 특히 오랜 전통, 고정관념, 가치관, 세계관 등을 말한다. 예수님은 새천년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조하셨다. 지구 본래의 지층에 오랜 세월 빗물과 바람 등에 쓸려 퇴적물이 쌓이면, 그 위에 다른 지층이 생기고, 그 지층을 또 다른 지층이 덥고, 또 덥고 하면서 물결 모양의 겹겹의 지층이 생긴다. 따라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본래의 지층이 흙속 수 미터 아래에 묻히게 된다. 그래서 발로 밟고 선, 눈에 보이는 표층밖에 모르는 사람은 표층을 본래의 지층으로 믿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히브리민족에게 주신 본래적인 토라 613개의 계명들 위에, 예수님 당시 이미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속에서, 랍비들이 첨가한 퇴적물들이 쌓여 만들어진 유대교 전통이 마치 본래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잘못된 전통이 유대교에 깊게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16-17절에서 예수님은 천년이 넘은 묵은 누룩, 장로들의 유전, 유대교의 전통, 곰팡이 균이 핀 묶은 포도주, 기존의 낡고 폐쇄적인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예수님께서 개방코자하시는 새천년시대에 걸맞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사상은 새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뜻으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한다거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숙성과정에서 가스를 발생시켜 부대를 팽창시킨다. 이때 낡고 약해진 부대는 터지고 만다. 낡은 옷에다 새 천을 대고 깁이면 새 천이 낡은 천을 잡아당겨서 찢어지게 된다.

이처럼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거나 낡은 옷에 새 천을 대고 깁이면 문제가 생기듯이, 시대에 뒤진 폐쇄적 율법주의로는 혁신적인 복음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사고(思考)는 복음적이었다. 복음적이란 신뢰와 믿음위에서 무에서 유를 만들고,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며, 닫힌 것을 개방하고, 갇힌 것을 풀어주며, 탕자가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이 복음적 믿음과 가치를 담기 위해서는 폐쇄적 사고방식, 낡은 형식주의, 죽임의 율법주의, 낡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

유대교의 금식 전통

유대인들은 새해 첫날인 ‘로쉬 하샤나’에 시작하여 대속죄일인 ‘욤 키프르’까지 10일 동안 지난해에 지은 죄와 허물들을 철저하게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기간에 본인의 죄와 허물을 반드시 용서받아야하지만, 남의 죄와 허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대속죄일은 지난해에 지은 죄 와 허물을 용서받느냐 마느냐와 생명책에 본인의 이름이 기록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심판의 날이며, 책이 인봉되는 날이기 때문에 또 이로써 신년 한 해 동안 복을 받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매우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24시간 금식하며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다. 참고로 유대인들의 새해는 우리나라의 음력 8월 1일 또는 음력 9월 1일에 시작된다.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 금식했다. 국가적으로는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위기에 닥쳤을 때 금식을 선포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부분 금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요일과 목요일에 매주 이틀씩 금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모세오경인 토라를 낭독한다. 이 전통을 ‘타카나’(takkanah)라 부르는데, 613개의 계명에는 없지만, 랍비들이 정한 관습법을 말한다. 월요일과 목요일에 토라를 읽도록 결정한 사람은 에스라였다고 한다. 둘째, 모세가 40일간 금식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목요일이었고, 금식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었다고 한다. 셋째, 월요일과 목요일은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금식하는 모습을 보여서 영광을 얻으려고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을 흉하게(마 6:16) 했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유대교 전통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라며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다.”고 답변하셨다. 성경시대의 혼인잔치는 상당히 여러 날 즉 일주일 내내 지속되었던 것 같다(창 29:27, 삿 14:12). 따라서 혼인잔치 기간인 7일간은 금식하는 일과 경문(유대인 남자들이 기도할 때 이마와 팔뚝에 붙들어 매던 쉐마 성구를 담은 트필린 상자)을 차는 의무가 면제되었다고 한다. 혼인잔치의 즐거움을 깨지 않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금식할 필요가 없고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암시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짧은 생애기간에 천국복음을 선포하셔야했으므로 금식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처럼 규칙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선교사를 파송할 때, 장로를 택하여 붙박이 목회자로 세울 때 금식 기도하였다(행 13:2-3, 14:23). 예수님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고, 때로는 금식도 하셨다.

유대교의 음식 전통

예수님 당시 세리들과 이방인들은 죄인들로 취급되었다. 10절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먹었던 “세리와 죄인들”은 다름 아닌 세무공무원들과 이방인들이었다. 당시 세무공무원들은 정복자 로마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세리들은 이방인들을 멀리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었다.

기존의 낡은 생각과 관습은 세리들과 이방인들을 멀리 하는 것이 거룩한 삶이었다. 유대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不淨)한 것, 정(淨)한 것, 거룩한 것으로 나눴고, 부정한 것(treyf)을 멀리하고, 정한 것(kosher)을 가까이 하는 것이 거룩한(kodesh) 삶이었다. 하물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와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눴으니, 바리새인들이 볼 때 어떻게 보였겠는가? 그것은 부정한 행위요, 힐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비난했을까?

그것은 유대교의 잘못된 전통인 ‘카샤룻’ 음식법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유대교의 ‘카샤룻’ 음식법을 깨는 범법행위였던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식탁교제를 꺼려했다(행 10:9-16, 11:2-3, 갈 2:11-14). ‘카샤룻’(Kashrut) 음식법 때문이었다. ‘카샤룻’은 무슨 음식은 먹을 수 있고, 무슨 음식은 먹을 수 없는지, 그 같은 음식들을 어떻게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지를 다룬 유대교인의 율법이다. 그릇 씻기 법에 따라 구별된 정한 조리기구들만을 사용하여 정한 식품만으로 정한 요리법에 따라 요리할 뿐 아니라, 정한 그릇에 담아 정한 방법으로 먹어야 하며,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 씻기 법에 따라 손에 물을 붓고 기도문(berachot)을 암송한 후에 먹고, 기도문의 암송으로 마쳐야 한다. 그러나 세리들과 이방인들은 이상의 것들을 도저히 지킬 수 없고 또 지키지도 않기 때문에 부정한 그들의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하면, 세리들과 이방인들은 기존의 낡고 율법적인 유대교 전통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았다. 그들은 전도와 구원의 대상이기보다는 멸시와 저주의 대상이었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친구처럼 교제하셨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과 차별 없이 동등하고 인격적인 대접을 하셨을 때, 마태와 삭개오에서 보듯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12-13절에서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하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은 참으로 적절한 말씀이었다. 자칭 건강한 자라고 믿는 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하겠는가? 자칭 거룩한 자라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당연히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건강한 자다, 의로운 자다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문제점을 깨닫고 자청하여 병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청한다면, 예수님은 지체 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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